▲ 이준현

춘천지법 공보판사

20세기중반까지도 미국은 공립학교는 물론 공공 식수대마저 인종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

189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백인 전용 공립학교와 식수대가 유색인의 그것들과 “구분되어 있지만 그 수준이 동등”하므로 헌법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반면 할런(John Harlan) 대법관은 “우리 헌법은 색맹”이라며 인종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개진했다. 반세기 후인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는 이전의 소수의견이었던 할런 대법관의 의견이 다수의견이 되어 공공시설의 인종분리정책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이 치열한 논증 끝에 내린 이 판결은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기념비적 판결로 손꼽힌다. 현재 미국 사법부의 위상과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이러한 판결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한 치열한 토론과 논증을 통해 사회의 가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대법원은 접수사건 중 약 1%(연간 100건 미만)만 ‘상고허가’하여 심리한다. 즉, 상고심 판단이 필요한 사건만 선별하여 대법관 모두가 충분히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 대법원은 접수사건이 2014년 한 해에만 3만 8,000건에 육박하다보니 대법관 모두가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사건은 매년 약 20건에 불과하여 사회의 근본적 가치선택에 관한 최종판단을 내리는 대법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정당한 권리자가 판결 확정시까지 오랜 기간 권리를 행사할 수 없고, 상당수의 사건이 심리불속행제도에 의해 종결되어 상고기각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결국 우리나라 상고제도 개선은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상고심 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여러 번 있었다. 대법관 아닌 법관을 대법원에 배치하는 방안은 대등한 합의부 구성의 어려움을 이유로, 각급 고등법원에서 일정 상고사건을 담당하는 방안은 법령 해석 통일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리고 10년간 시행된 상고허가제는 상고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아 모두 폐지되었다.

이에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대법원과 별도로 상고법원을 설치하는 방안이다.

즉, 대법원은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집중하여 정책법원의 역할을 담당하고, 상고법원은 개별 분쟁에서 기존 법리를 적용해 국민의 권리구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상고법원 도입의 타당성과 내용에 관해서는 지난해부터 대법원, 변협 및 학회 등에서 수차례 논의되어왔고, 법률안 발의 후에도 공청회나 정책토론회를 통해 보완책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그 결과 상고법원 도입의 현실적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최근에는 상고법원 도입으로 인한 재판당사자의 이익이 매년 최대 2124억 원에 이른다는 경제학적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대법원은 그동안 여성의 종중원 자격인정 사건, 성전환자 호적정정 사건 등에서 사회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법적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해왔다.

최근에는 공개변론을 열어 혼인파탄에 책임이 있는 이른바 유책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상고법원이 도입되면 개별 분쟁을 적시에 충실하게 심리함으로써 국민의 권리가 더욱 보호됨은 물론 대법원은 유책배우자 이혼청구사건처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분쟁에 더욱 집중하여 법적 가치기준을 제시할 것이다.

재판을 통한 국민의 권리구제와 대법원의 기능 회복을 위한 현실적인 차선책으로 고안된 상고법원 제도가 조속히 도입되어 결실이 맺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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