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이중

변호사

오나라의 왕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하고 부상까지 입어 임종에 이르자, 아들 부차를 불러 구천에 대한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부차는 합려의 유언을 잊지 않기 위해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복수를 다짐했다. 부차의 이 같은 소식을 들은 구천은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패하여 포로가 된 후 3년간 갖은 고역과 모욕을 겪었고 목숨만 겨우 건져 귀국한 후 잠자리 옆에 항상 쓸개를 매달아 놓고 핥아 쓴맛을 되씹으며 자신을 채찍질했고, 결국 오나라를 정복하고 부차에게 복수를 했다. 이렇게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잔 부차의 행동을 ‘와신’, 쓸개를 핥아 쓴 맛을 되씹은 구천의 행동을 ‘상담’이라 하며, 이를 합쳐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의 ‘와신상담’이라고 한다.

시장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홀로 힘겹게 두 아들을 키우던 필자의 어머니는 1990년 봄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군대에 막 입대했던 형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복귀를 했고, 홀로 남은 필자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로 고통스러웠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하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2달 정도가 흐르자 ‘이렇게 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슬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입시 준비를 했으나 곤두박질 쳐진 성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과외교습과 건축현장의 일용잡부로 생활비를 벌어 삼수 끝에 서울대에 합격을 했다.

병역의무를 마친 후 1995년 복학했지만 미래에 대한 그리 확고하고 대단한 목표의식도 없었고, ‘오늘까지만 살아도 아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었다. 다만,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존심만은 있었기에, 과외교습과 오토바이 퀵서비스배달 등 온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울 생활을 버텼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로 4학년이던 1998년 취업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서울대를 나오면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해서 습한 반지하 월세방을 벗어날 수 있겠다’는 소박한 희망도 무참히 짓밟혀졌다. 수십장의 입사원서를 쓰고 가까스로 월급 100만원 남짓을 받는 중소 건설회사에 입사를 했다가, 이듬 해 월급도 괜찮은 무역회사로 이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퀵서비스배달을 할 때 한겨울에도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는게 화가 됐다. 회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빠져 30살에 회사를 그만둘 수 밖어 없었다.

고심 끝에 ‘사법시험’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됐다. 당시 서울 대형병원의 간호사로 근무를 하고 있던 아내에게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2003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면서 아내와의 약속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하지만 2008년까지 연속으로 치른 6번의 2차 시험에서 내리 떨어지면서 삶을 지탱했던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로 노력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일말의 자존심까지 산산이 깨져 버렸다. 인생은 돌이킬 수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절망의 터널에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보며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고시원에 틀어박혀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끼며 공부에만 몰두한 끝에 마침내 2009년,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요즘 자살과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절망으로 삶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하루 하루를 버티어 나가다 보면 오늘 되지 않던 일이 내일 잘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들의 공부방 책상 위에는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사용하던 독서대가 놓여져 있고, 독서대 위에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붙여 두었던 글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와신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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