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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라고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녹슨 철조망에다가 구멍 뚫린 철모 위로 피어난 민들레에다가 전쟁에다가 분단에다가 간첩과 공비에다가 산등성이에서 삭풍을 맞으며 M-16을 허리에 세운 초병에다가…그런 것이었다. 나에겐 이런 DMZ의 추상과 구체가 한 순간에 시공을 건너 머릿속에서 어둡고 차갑게 튀어나올 따름이었다.
 그랬으므로 나에게 DMZ는 결코 문화일 수 없었다. 부지불식 간에 나는 정서와 미감(美感)을 안겨 주는 것만을 문화라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란 이런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하는 인문적(人文的) 양식의 총체를 이름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나의 문화 인식이 얼마나 수준 낮은 편견에 근거한 것이었는지 놀라울 따름이고, 그리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을 포함해 한민족 모두에게 관련되는 인문적 양식의 총체로서 DMZ는 당당한 하나의 문화다. 이런 새삼스런 주장에 혹자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DMZ 문화'란 무엇인가? 때가 때인 만큼 특정 목적에 이용하려는 문화도구주의적 문화를 얘기하는가? 또는 문화 그 자체만을 위한 문화지상주의적 문화인가? 아니면 돈으로만 보는 경제환원주의적 문화인가?
 이런 질문에 속이지 않고 대답한다면, 나의 'DMZ 문화론'은 그 모두를 합한 것이다. DMZ는 존재 양상의 특이성만큼이나 문화적 의미와 가치 또한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하나로만 규정될 수 없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문화적 보고(寶庫)인 DMZ를 문화적 관점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낫지 않는 역사의 상처로만 여겼다. 그러다가 세계 각처에서 별 것 아닌 인문적 재산을 대단한 문화 상품인 양 선전해대는 것을 보고 '문화 전쟁'에 몰리던 강원도가 뭐 좀 없나 살피다가 요즘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따끈따끈한 최근 소식으로 이런 게 있다. 북구 핀란드에서 북극권에 위치한 인구 3천5백 명의 소도시 로바니에미가 '산타할아버지' 마케팅으로 지난 몇 년 간 세계인 40만 명을 불러들여 4조 원의 관광 수입을 올렸다는 얘기다. 이런 뉴스가 날아온 바로 그 날 강원도는 세계박람회 여수 유치 무산 소식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도 혹 그처럼 밀리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에 잠시 휩싸였다. 이 극명한 대조에서 오히려 한 대안이 찾아지지 않는가? 즉 한반도 분단 현실이 동계오륜 유치의 한 당위로 원용된다면 그 실증적 현장인 DMZ를 마치 로바니에미의 산타할아버지 모양 전면에 내세울 만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DMZ를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기꺼이 팔아먹고, DMZ를 세계스키연맹에 적극적으로 팔아먹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해 보자는 것이다.
 최근 나는 DMZ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바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의 한 언저리에 설 기회를 가졌다. 즉 지난 한 세대 동안 오직 DMZ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사랑해 온 한 전문기자가 '할아버지, 연어를 따라오면 한국입니다'란 제목의 책을 출간하여 DMZ 곁 무너진 한 교회 터에서 의미 깊은 출판기념회를 갖는 전 과정을 본 것이다. 이를 보면서 나는 그의 작업이야말로 DMZ를 문화지상주의적 차원에서 업그레이드하고, 문화도구주의를 넘어 경제환원주의적 수준에서 경쟁력 있는 문화로 가꾸는 소중한 행위임을 깨닫게 됐다.
 연전에 우리의 뮤지컬 '명성황후'가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 게 된 배경 중 하나는 탁월한 호주인 편곡자 피터 케이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해 상대적으로 치졸했던 우리의 작품이 변신을 거듭함으로써 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게 된 것이다. 함광복 기자가 쓴 '할아버지, 연어를 따라오면 한국입니다'를 읽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생명 없이 삭막하던 우리의 DMZ가 생명이 가득 찬 위대한 땅으로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것이다. 그에 의해 우리의 DMZ가 드디어 품위 있는 문화 상품이 된 것이다. 이런 수준의 문화 상품인 DMZ를 팔아먹자는 것이 내가 말하는 'DMZ 문화론'이다.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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