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현옥

문화커뮤니티 금토 상임이사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춘천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직장도 줄 곳 춘천이었다. 서울이 주 생활공간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으니 지역인구 늘리기에 작은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할까? 나름 갑으로 살 수 있는 직장을 오래 다녔고, 조금 더 즐거운 일을 위해 갑의 지위를 버리고 능동적 을이 되었다. 문화기획자로서 공공성을 지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 하는 것이 내 일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렇게 언론, 문화 영역에서 쌓인 경험과 전문지식은 꽤 여러 분야의 네트워크를 갖게 했고 강원도의 문제를 논의할 때는 대표적 자격으로 전국 규모의 모임에도 종종 참여한다.

그런데 때늦게 나의 이력에 대한 자괴감이 드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기보다는 학벌과 인맥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몇 차례 그런 틀에 놓이고 보니 형편없는 이력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처 인식하지 못한 이 현실은 그동안 간판을 들고 어딘가 나서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일 게다.

이 부끄러운 처지를 드러내는 것은 이런 현상이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갖는 열등감이고 자괴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비롯해 지역인물을 선택할 때 그래도 ‘중앙에서 놀던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의식은 나처럼 ‘지역에서만 놀던 사람’에게서 더욱 강하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언제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인사들이 주르륵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그들의 화려한 경력에 감탄하며 내가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해줄 것 같은 환상을 품게 된다. 위로부터 오는 구세주가 되는 것이다.

물론 중앙 집중적인 정치구조에서 그들이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학맥과 인맥이 의사결정에 중요한 요소인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중앙의 정치와 예산에 의존해야하는 것이 지방이므로 이 구조에 단단한 줄을 댈 수 있는 인물이 절실하다. 그래서 지역신문에서는 중앙의 정치권이나 행정의 주요 보직에 도 출신 인물이 얼마나 포진되었는가? 지역 배려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주요 뉴스로 다루곤 한다.

그러나 이런 척도가 폭력적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역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컨대 ‘지역의 문제를 체험적으로 알고, 지역주민이 답답할 때 거리감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 기준은 조금 달라진다. 지역의 가치에 주목하고 그것을 키워가려고 자기영역에서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을 키워내는 일도 중앙인맥 찾기 못지않은 지역의 과제이다.

비록 화려한 경력은 없지만 지역현실과 문제점을 잘 알고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사람들을 가볍게 보는 것은 변방 컴플렉스의 반영이다. 이 오래된 관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에 내 후배는 전국적인 명함을 달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야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으므로. 지역을 거점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전국구임을 증명해보일-명함 한 줄에 넣을 그 무엇이 있어야 일하기가 수월해진다.

이런 관성이 유지되는 한 지역분권, 지역발전은 멀기만 하다.

요즘 어디를 가나 청년 일자리 만들기가 화두이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지역에서 일할 것인가?

우리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틀, 중앙과 지방의 우월이 이렇게 확연한데 저들에게 지역에 있으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이류, 삼류 시민으로 살라는 의미는 아닐까? 그리고 나에게도 다시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지역에 묻혀서 살았을까?

스스로를 이류, 삼류로 낙인찍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지역이 발전하려면 지역의 가치, 지역 사람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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