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 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기자는 지난달 31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 파리광장 거리에서 빌리 브란트(1913~1992년) 전 독일 총리를 만났다. 마침 그를 추모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기자의 발길을 잡았다. 이날 시선을 집중시킨 역사의 한 장면은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뱌의 ‘유태인 봉기영웅 기념비’에 무릎을 꿇은 브란트 총리의 흑백사진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 600만명에 대해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사죄를 하면서 유럽 전체에 대한 평화와 통합의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브란트 총리는 언론에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고 인류와 역사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언론들은 브란트 총리의 세기적 사죄에 대해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무릎을 꿇은 유태인 봉기영웅 기념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유태인 거주제한 구역이었던 ‘게토’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돌로 단을 쌓아 4각의 석조 기념탑을 세우고, 가운데 나치의 학살에 저항했다 희생된 영웅들의 몸짓과 주검을 검은 돌에 양각으로 조각해 놓았다. 기념비 정면에는 폭압에 저항했던 유태인을 상징하는 형태의 유태인 박물관이 서있다. 왼편에는 당시 폴란드 외교관으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서방세계에 고발했던 얀 카르스키(1914~2000년) 교수의 동상이 있다. 최근 이 곳을 찾았던 기자는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하면서 게토에 갇힌채 무참히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영혼들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외부에 고발했던 지식인, 그리고 전후 유태인과 인류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빌었던 한 정치인을 생각했다.

한국과 폴란드 외교부는 지난달 30일 유태인 박물관에서 ‘폴란드-독일 화해과정, 동아시아의 화합 모델이 될 수 있을까’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60만명(유태인 300만명 포함)이 나치 독일군에 의해 도륙됐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죄를 계기로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하고 1991년 우호 선린조약을 체결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로, 폴란드 외교부 수장을 지낸 브와디스와프 바르토셰프스키 장관의 아들인 역사학자 바르토셰프스키 박사는 이날 “독일의 학살은 더이상 참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하지만 양국은 경제적, 인적 교류 확대와 과거사를 직시하는 노력 끝에 독일은 폴란드의 최대 교역국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선의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관계를 유지하고 진전시키기 위해 양측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총리가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지난 12일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우리 독립투사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또 식민지배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던 역대 일본 내각의 담화를 인용하며 “이런 마음의 표현은 상처 입은 나라의 국민들이 ‘그만두어도 좋다’라고 하는 시기가 올 때까지 계속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하토야마 총리의 사죄를 지켜보며, 45년전 브란트 총리의 사죄를 생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란트 총리의 진심어린 사죄는 훗날 역사의 길잡이가 되어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일본 내부 일각의 반발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하토야마 총리의 사죄도 조만간 한·일과 중·일 과거사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어,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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