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1765년(영조41년) 11월2일. 영조는 동지사에 임명돼 연경(燕京)으로 떠나는 이훤,김선행,홍억의 하직인사를 받았다. 어찬을 내리고 사언시 2구를 하사함으로써 사행길을 축하했다. 동지를 전후해 청나라를 찾은 사절단은 12월27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도착했다.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년)은 작은 아버지로,사절단의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서장관 홍억(洪檍)을 수행했다. 대용(大容)은 이듬해 정월 유리창에서 항주의 선비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를 알게 되어 교유했다. 동지사 일행은 3월1일 북경을 출발해 4월11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했다. 대용은 그해 6월15일 연경에서 중국인 벗들과 나눈 필담,시문,편지 등을 정리해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會友錄)을 펴냈다.

덕보(德保) 대용이 항주(杭州) 선비 엄성 일행과 교유한 시간은 2개월 남짓.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회우록’과 연암의 ‘홍덕보 묘지명’을 통해 18세기 후반 동북아 지성사에서 세기의 만남으로 기록됐다. 중국 절강성 수도 항주는 학술사나 예술사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했다. 물산이 풍부해 학술과 예술의 요람으로 정평이 났다. 강소성 수도 소주(蘇州)와 더불어 강남(江南)으로 명명되며 남송이래 사대부 문화의 허브였다. 한족의 나라 명(明)이 만주족의 나라 청(淸)에 의해 망한뒤 작은 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항주는 동경의 대상, 그 이상이었다. 지리적 공간을 넘어 이념적 공간이었다.

조선 선비 대용과 항주 선비 엄성의 만남은 벽과 한계, 그리고 선입견이 없었다. 조선은 노론,소론,남인,소북의 사색당파가 판을 쳤다. 사농공상은 물론 문반,무반,서얼,중인의 사색신분도 엄연했다. 의론이 다르고,지체가 다르면 말을 섞지 않고,벗으로 삼지 않았다. 땅도 좁고,습속도 편협했다. 하지만 대용과 엄성은 여관을 찾아 가거나 편지를 주고 받으며,오랜 친구처럼 주자학과 육왕학의 차이,세도의 성쇠,출사와 물러남의 영광과 욕됨 등에 대해 꺼리낌 없이 의견을 나눴다. 견해가 웅대하고 걸출하여 기쁘기 그지 없어 지기로서,의형제로서 우의를 쌓았다. 그들은 헤어질때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천고에 다시 만나지 못할 테지요.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합시다”

대용과 엄성의 우정은 사후까지 이어졌다.

만주족의 나라에서 출사의 꿈을 접은 엄성은 1768년 37세를 일기로 숨졌다. 소식은 친구 반정균에 의해 조선의 대용에게 전해졌다. 대용은 부친상 중에도 애사를 짓고 향을 갖춰 항주에 보냈다. 마침 애사가 전해진 날이 엄성의 대상 날이어서 항주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엄성의 아들 앙(昻)은 대용을 큰 아버지로 불렀고,아버지의 유고와 아버지가 생전에 그린 대용의 초상을 조선에 보냈다. 엄성은 병환중에도 대용이 선물한 조선의 먹을 꺼내어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 놓은채 운명했다.

대용은 지동설을 터득한 천문학자이자 구구단을 조선에 처음 들여온 수학자였다. 세손익위사 시직,사헌부 감찰,영천군수를 지낸 사대부였지만 신분을 초월해 서얼들과도 교유했다. 1783년 엄성과 교유한지 17년만에 지기 곁으로 갔다. 절친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은 대용의 부음을 항주에 전한뒤 엄성이 고인에게 보낸 서화,편지,시문을 빈소에 펴놓고 통곡했다. 그리고 덕보의 묘지명을 지어 평생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은 두 선비의 재회를 축원했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항주에서 강원을 찾은 서호의 벗들을 생각하며 250년전 고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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