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문학박사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산을 오르내렸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산을 누볐다. 봉화를 올리기 위해서, 적을 피하기 위해서, 가렴주구를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도를 구하기 위해서 찾은 곳도 산이었다. 산은 삶의 현장이었고,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따뜻하게 품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산이 싫었다. 겨울방학 동안 나무 한 가리를 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내 지게에 낫과 도시락을 걸치고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마을 주변의 산은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머리를 깎듯 단정하게 정리했기 때문에, 먼 산을 올랐다. 나무 두 단(어른들은 세 단씩 졌다)을 지고 산을 내려와 고개를 넘는 것을 반복하는 겨울은 달콤함 보다는 힘겨운 기억을 만들었다. 폭설이 내리면 며칠 쉴 수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눈 내리길 바랐다. 이 시기엔 산에 오르면 나무만 보였다.

자대배치를 받고나니 양구였다. 고향의 산보다 더 높을 뿐만 아니라 험했다. 행군의 고통은 한 순간이었다. 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설 때는 마의 300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다. 영하 몇 십도의 날씨에도 땀을 흘려야 했다. 보초를 서다 앞을 바라보면 산들이 파도치듯 밀려왔다. 뒤를 돌아봐도 산 산 산이었다. 후방으로 철수해 근무할 때는 빗자루용 싸리나무를 찾으러 산을 뒤졌고, 진지 보수 작업에 들어가면 몇 주씩 산 아래 텐트를 치고 산 위로 작업을 하러 다녀야 했다. 산은 군대생활을 더 힘들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등산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혼하자 서서히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건강을 위해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예전 같지 않은 몸과, 정기적인 건강검진 결과가 무서워 새벽에도 오르기 시작했으니 세상 참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인지 선인들은 산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산에서 만나는 경치와, 아름다운 경관에서 촉발된 느낌 등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글이 유산기(遊山記)다. 유산기에 등장하는 산은 시를 짓게 만드는 흥취의 원천이 되기도 했고, 탐방의 대상이 아니라 도체(道體)가 깃들인 곳으로 이를 통해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인식되기도 했다. 선인들이 산을 유람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해진 유산기를 번역하고, 그들이 걷던 길을 따라 조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설악산을 걷고 있었다.

설악산은 아름다운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스한 눈길과 마음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를 하고 사탕을 주고받았다. 현실에서의 날선 눈초리는 순해졌고 각박한 마음도 느긋해졌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더니 모두 어진 사람이 되었다. 선인들의 글을 따라 걸으니 곳곳에 남겨진 시가 반기고, 설악산의 품에 안겼던 집터도 보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오세암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한을 삭였고, 김창흡은 설악산의 이곳저곳에 집을 짓고 설악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렸다. 이후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이 설악산을 찾았고 시문으로 설악을 노래했다. 못은 그냥 이름 없는 못이 아니었고,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유산기를 읽고 걷는 설악산은 이전의 설악산이 아니었고, 한시로 묘사된 이곳저곳은 다른 얼굴로 반겼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산에 대한 트라우마는 사라졌고, 설악산뿐만 아니라 오대산과 청평산, 치악산과 태기산을 거닐게 되었다. 산은 전혀 다른 산으로 다가 왔다. 기묘한 아름다운, 혹은 장엄한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인들이 아로새긴 문자의 향기를 여기저기에 머금고 있었다.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문제로 시끄럽다. 선인들은 어떤 입장일까? 오늘도 산이 품고 있는 향기를 찾기 위해 선인들의 유산기와 한시를 챙긴다.

▶약력= △문학박사 △한국한문고전연구회 이사 △한국등산사연구회 이사 △-저서 ‘조선 선비,설악에 들다’,‘춘천의 문자향’,‘화천인문기행’,‘옛 글 속에서 인제를 만나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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