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埴 논설위원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새로운 계획을 세울 만한 비교적 조용한 신년 벽두 두 번째 토요일, 비관주의자나 회의론자들은 세기 초 바로 이런 때 뭔가 예기치 않은 큰 사건이 터져 인류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지 모른다며 터무니없는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라면 이와 전혀 다른 꿈을 꿀 것이다. 예컨대 북핵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핵폭탄이 어느 한 순간 완전히 기능을 상실해 고철 덩어리로 변해 버릴 수도 있으리란 얼토당토않은 상상 같은 것 말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새해란 늘 이런 식의 절망 혹은 희망으로 시작되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스키장에도 가지 않고, 조금 지루해진 토요일을 자신의 근거 미약한 상상의 덧없음에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하며 하릴없이 텔레비전이나 지켜보지 않았던가. 채널을 돌리다가 테니스 코트에서 하얀 공이 이리 저리 튀어 다니는데, 아니 저건 이형택(李亨澤)이 아닌가! 우리들은 이형택이 세계 랭킹 4 위랑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뉴스를 떠올리고 바짝 다가앉게 되었는데-.
 사실 많은 한국인들은 그 후 두어 시간을 거의 숨도 쉬지 못하고, 아니 숨을 몰아 쉬면서 경기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차례나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등 한국 스포츠사상 이런 숨막히는 경기는 처음이다 싶을 정도의 절묘하고도 짜릿한 명 승부전이 펼쳐졌다. 순간마다 혹자는 박세리의 쾌거가 재연되지 않을까, 이봉주의 역주가 반복되지 않을까, 최경주와 박찬호의 화려한 세계적 성공을 과연 다시 보게 될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우선 우리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를 떠올렸고, 뒤 이어 머리 속에서 월드컵의 젊은 영웅들인 이을용 설기현 이영표를 그려냈다. 이들 강원도 출신 청춘들의 눈물과 영광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같은 결과가 또 한번 실현되기를 얼마나 기원했던가. 마치 육박전이나 육탄전과도 같았던 마지막 타이브레이크에서 페레로의 공이 사이드라인을 벗어나자 한국 측 응원단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국 스포츠 근대사 100 년 동안 그렇게도 갈망하던 세계 테니스 대회에 강원의 기린아 이형택이 드디어 극적인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이형택의 우승은 이형택 개인은 물론 그를 키운 홀어머니에게도 이제 명예와 함께 부를 가져다 줄 것이다. 테니스계를 비롯한 한국 스포츠계도 엄청난 부가 가치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이형택의 우승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바로 우리 국민이며 특히 횡성군 우천면 사람들과 봉의고등학교 후배들을 포함한 강원도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자.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홈런왕인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나 보스톤 레드삭스의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이다. 도미니카는 인구 8백만 명의 가난한 나라다. 스포츠 과학자들은 도미니카와 케냐 같은 약소국가에서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다수 배출되는 이유를 사회적 맥락에서 찾으려 한다.
 아무리 계산해도 300만 명을 넘지 못하는 강원도에서 골프와 승마처럼 흔히 귀족 스포츠라 불리는 테니스에 세계적인 대 선수가 탄생된 것이다. 스포츠 과학자들이여, 스포츠 사회학적 접근으로 강원도를 다시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분간 국제사회에서 '이형택이 곧 대한민국'이란 등식이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다. 이어 '이형택 즉 강원도'란 인식이 확산될 것이다. 누군들 어찌 강원도를 '촌스러움' '감자바위' 따위의 이름으로 포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귀족이다. 황영조 이래 이제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권력이다. 85 위가 4 위를 이겨낸 것만큼의 스포츠 권력을 드디어 획득해낸 것이다.
 2010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이형택 효과가 극대화할 수 있도록 힘쓸 때다. 그의 승리가 시너지 효과를 부를 것이란 확신을 갖고 추진할 때다. 새해에 비관주의와 회의주의는 마침내 사라져라. 드디어 낙관주의가 우리들을 꿈에 부풀게 만들었나니.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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