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호영

강릉최씨대종회장

전 고성교육장

며칠 전 우리 강릉최씨(忠齋公)의 시조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오는 강릉시 포남동의 강원도기념물 제3호인 ‘용지(龍池)’에 들렀다. 이곳은 강릉최씨의 시조이신 부마도위 충재 휘 문한공(駙馬都尉 忠齋 諱 文漢公)의 한(恨)이 서려있어 그런지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듯 그때의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연못의 둘레를 둘러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강릉최씨의 시조께서 살았던 고려 말기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禑王)을 축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신진관료층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등 끝내는 공양왕을 내쫓고 새 왕조(李朝)를 세움으로써 고려는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 남 달랐던 충숙왕의 부마였던 시조께서는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경기도 개풍군)에 은거하며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72인중 한 사람이었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려의 재건을 도모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종사(宗祠)를 보전하기 위하여 제기(祭器)를 안고 숭명공주(崇明公主:부인)와 함께 1392년 8월 동래(東來)한 곳이 바로 강릉의 마상리(馬上里:지금의 임당동)였으며, 이곳에 세가(世家)를 이루고 은거(隱居)하시니, 이분이 바로 우리 강릉최씨의 시조이시다.

시조(始祖)이신 문한공(文漢公)께서는 강릉으로 퇴둔(退遯)하신 후에도 고려의 부흥을 위해 강릉과 송경(松京:개성)을 왕래하면서 고려의 부흥을 꿈꾸었다. 그는 송경(松京)을 왕래할 때 항상 애지중지하는 준마(駿馬)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송경(松京)에서 돌아와 연못가의 수양버드나무에 말고삐를 매어 놓고 말을 씻겨주며 쓰다듬고 있던 중, 갑자기 못 속에서 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러자 애마(愛馬)가 크게 울면서 안개가 솟아오르는 못 가운데로 뛰어들어 용으로 변하면서 운무(雲霧)를 타고 하늘로 올라 가 버렸다. 이로 인하여 이 못을 ‘용지(龍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한공(文漢公)께서는 자기가 타고 다니던 애마가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는 것을 보고, 고려의 국운이 다 하였다고 생각하여 숭명공주(崇明公主)와 함께 이곳 강릉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용지(龍池)’는 그 둘레가 수백 보에 이르는 큰 못으로 창포와 연꽃, 그리고 버드나무가 무성한 아름다운 연못이다. 그 후 이곳 주민들이 연못을 메우고 논을 일궈 경작하던 것을 1754년(英祖 30年) 강릉부사(江陵府使) 이현중(李顯重)이 다시 못을 팠으며, 3년 후인 1757년에 향리의 유림들이 정소(呈訴:소장을 냄)하여 복구하였다.

그 뒤 퇴락(頹落)한 것을 우리 후손들이 다시 중수하고, 못에는 석축을 쌓았으며, 강원도문화재위원회(江原道文化財委員會)에서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강원도기념물 제3호(江原道紀念物 第3號)로 지정 공시(公示)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여러번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으며, ‘용지(龍池)’하면 ‘강릉최씨(忠齋公)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용지기념각(龍池紀念閣)’의 서편 처마에 걸려있는 ‘용지(龍池)’라는 현판은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1786∼1856)선생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잠시나마 용지에 묻혀있는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서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얼과 유훈을 본받고 강릉최씨의 뿌리를 새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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