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원

소설가

대관령 아래 산촌을 떠나 도시에 와 살기 시작한지 30년이 넘는 것 같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그때부터 친다면 40년이 된다. 그렇게 오래 시간이 지나다보니, 달력으로만 시간이 가는 줄 알지 자연으로 가는 시간을 종종 잊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봄이 오면 바로 텃밭에 나가 냉이를 캐고, 달래를 캐고, 또 이런저런 꽃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지켜보았다. 그때는 달력으로 시간이 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집안 안팎의 꽃나무와 봄나물들로 계절을 가고 오는 것을 보았다.

예전에 고향의 한 선배 소설가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그 선배는 나이가 그때 나이가 쉰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달래와 냉이의 이름이 헷갈린다고 했다. 어떻게 헷갈리냐고 물으니까 그것의 생김새와 뿌리 부근의 구슬 같이 생긴 구근을 깨물었을 때 입 안 가득 감도는 향기로 보자면 달래는 ‘달래’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냉이’라는 이름과 더 어울리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데 이 선배뿐 아니라 뜻밖에 달래와 냉이의 이름을 서로 바꿔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달래라는 이름은 왠지 부드럽고, 냉이라는 이름은 뭔가 입 안을 톡 쏘는 독특한 향기가 이미 이름 안에 들어 있는 듯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착각이 농촌보다는 시내에서 나고 자라 달래와 냉이를 들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니라 밥상 위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아마 어릴 때 들판에서 달래와 냉이를 보았다면, 그리고 그것을 호미로 직접 캐 보았다면 그런 착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고향 시골집에 가면 지금은 두릅밭으로 변해버린 닥숲이 있다. 처음부터 그곳에 닥나무가 많아서 닥숲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예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젊은 날 닥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그곳으로 파 옮겨서 닥숲을 만들었다.

그래서 매년 늦은 가을이면 인근의 한지 공장 사람이 노새가 끄는 수레를 몰고 와서 닥나무를 베어갔다. 그리고 한달 이상 지난 어느 날 다시 한지 공장 사람이 창호지 뭉치를 들고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내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집에서 쓰는 창호지를 닥나무를 키워 그걸 종이와 닥나무의 물물교환식으로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한지 공장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닥나무는 더 큰 숲을 이뤘지만 그걸 베어갈 사람도, 베어가서 종이를 만들 공장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십수년 전 아버지가 예전의 할아버지처럼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한 그루 두 그루 두릅나무를 파 옮겨 심었다. 그것이 뿌리를 뻗고 새 가지를 쳐 몇 년 사이 온밭이 두릅나무 숲이 되었다. 종이보다 나물이 더 귀한 시절이 된 것이다. 그렇게 닥숲을 두릅밭으로 만든 아버지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바뀌어 버린 밭 중에 뽕나무밭이 있다. 한때는 누에고치 값이 좋아 밭둑에만 서 있던 뽕나무가 밀과 콩 등 곡식을 밀어내고 멀쩡한 밭을 차지했다. 어느 동네에도 커다란 잠실 몇 개씩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에 한 마리 키우지 않는 고목으로 우거진 뽕밭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상전이 벽해가 된 것이 아니라 상전이 화전꾼의 밭처럼 폐전이 되고 만 것이다.

들으면 그것도 우울한 소리뿐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봄마다 내가 기억하고 추억하는 고향 풍경은 동네 우물가 미나리밭 사이로 어미닭과 병아리 떼가 종종종 떼 지어 다니며 봄나들이를 하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병아리 떼가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난 걸 보며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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