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지난 4월13일. 박근혜 정부와 집권 여당이 휘둘러온 입법권력이 야권으로 넘어가던 날의 일화다. 청와대 출입기자 6명이 당일 아침 대통령의 투표 일정을 취재한후 서울 종로 돈화문 앞에 모였다. 총선일 오전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창덕궁 후원을 돌아보자는 말이 발길을 재촉했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한 일행은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을 거쳐 인정전 일원을 구름에 달가듯 둘러봤다. 일행 중 한 명은 영화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일물(一物), 뒤주가 놓였을 인정전 앞 조정에서 상념에 잠겼고, 다른 한명은 품계석 옆에 서서 월대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헌종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낙선재 주위는 봄을 맞아 꽃들의 경염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복권된 동궐의 전각들도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가는 신록에 파묻혀 갔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 고개를 휘돌아 내려가는 흙길은 간 밤의 봄비에 말끔하게 씻겨 정갈했다. 인적이 끊기고 자동차 소음도 사라진 텅빈 후원은 바야흐로 봄볕과 새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정조와 규장각 초계문신들이 학문과 국사를 논했던 주합루와 부용지, 신진 관료를 뽑는 전시를 보던 영화당과 춘당대도 맑은 기운이 넘쳤다. 영화당 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니 역사가 되살아 났다. 정조 2년(1778년) 6월3일. 가뭄 끝에 비가 내렸다. 비가 반가운 정조는 승지들을 재촉해 영화당을 찾았다. 그리고 왕실이 돌보던 논을 둘러봤다. “후원의 수전(水田)은 곧 열성조(列聖朝)에 풍년이 드는지를 관찰하던 곳인데 비가 내린 뒤에 벼 잎이 한층 파랗게 무성해졌기에 그대들과 더불어 보려고 한다”. 정조의 목소리가 238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들려오니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반나절의 꿈같은 여유는 총선 종료와 언론사의 출구조사 결과 발표로 끝나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입법권력이 집권여당에서 둘로 갈라진 야당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전국민과 함께 지켜봤다. 총선 참패에 대한 여러 분석대로 절반의 책임은 청와대, 또 다른 절반의 원인은 새누리당에 있다.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전근대적인 국정운영 스타일과 박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 국회의원 뱃지를 노렸던 소위 친박의 권력욕이 화를 자초했다고 본다. 협치 보다 통치로 나라를 호령하고, 덧셈의 정치가 아니라 뺄셈의 정치로 여당을 길들이며, 소통 보다는 불통으로 일관하며 국회에 회초리만 휘두르는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을 떠나게 했다는 분석이다. 한술 더떠 당권과 대권에 눈이 멀어 옥새분란까지 일으킨 새누리당의 퇴행적 행태는 타 들어가는 민심에 기름을 붓었다는게 세간의 평가다.

영화당 기둥에 등을 대고 잠깐 눈을 붙인 사이 만난 정조 이산. 그는 재임 24년동안 수많은 시문을 남겼고 이를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담았다. 홍재전서(120~121권)의 추서춘기(鄒書春記)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는 것은 그 죄가 작지만(未可以言而言者 其罪小), 말해야 할 때에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죄가 크다(可以言而不言者 其罪大)’는 글을 마주하게 된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기자로서, 말해야 할 때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는지, 써야 할 때 제대로 쓰지 않았는지 자문해 본다. 4월 총선 결과 나타난 민심을 읽어내며 필자의 죄가 자못 크다는 자책도 해본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은 저 놈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정조의 추상같은 엄명이 들려오니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떤다. 4월을 보내며 이렇게 나마 죄를 자복해 본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