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떻게 화가라는 사람이 대작조수에게 90%를 맡기고 10%만을 자기가 그리고 자기 것인냥 판다는거지? 이름을 건 예술작품이면 자신의 땀과 영혼이 담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화가의 양심 아닌가? ‘세상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언어가 존재한다’라는 책 연금술사의 한 구절처럼 이것은 문외한인 보편적 다수가 전문가인 예술인들에게 갖는 상식적 생각일 수 있다.

조수와 화가의 관계는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조영남은 주장한다. ‘관행’의 사전적 정의는 ‘오래전부터 해오는 대로 함’이다. 일상적 의미로의 관행은 묵계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것이니 설사 위법적 성향이 있더라도 눈감아야한다는 사회적 함의로 인식된다. 즉 설령 문제적 소지가 있더라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두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무언의 동의쯤으로 이해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관행이 상식적인 도를 너무 넘어서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하면 더 이상 관행이 될 수 없다.

숲속 움막에 살고 있는 한 화가는 몸체는 그렸지만 목과 얼굴을 그리지 못한 미인도를 10년째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날 한 처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눈뜬 소경인 그녀의 초점없는 눈동자는 미인도에 적격이었다. 화가는 움막에 그녀를 데리고와 그녀를 보고 얼굴과 목을 그렸다. 눈동자만 남겨놓고 화가는 그녀와 하루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녀의 눈동자를 그려넣으려는 순간 화가는 깜짝놀랐다. 순수했던 그녀 눈동자가 사랑에 빠진 눈동자로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김동인의 소설 ‘광화사’ 일부 줄거리이다. 똑같은 눈을 다르게 볼 수 있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화가의 능력이자 일이다. 결국 화가가 담아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외형 이상의 가치이고 메시지이다. 이는 우리가 조영남의 대작에 분노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장자는 도에 관해서 네가지 병폐를 말했는데 그 중 한가지 병폐가 탐(貪)이다. 이는 사사로운 재주를 부려서 남의 권리를 갈취해 자기 이익으로 취하는 것을 뜻한다고 장자는 말한다. 어떤 변명을 해도 조영남은 비도덕적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많은 것을 누리게 해준 국민에 보은하는 길이 무엇인지 자숙해야한다.

조미현 기획출판부 국장 mi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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