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수

춘천지법 국선전담

변호사

“이제 집에 가자. 오늘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집에 가자. 슬슬 피곤하니까” 가수 장기하가 부른 ‘사람의 마음’이란 곡이다. 직장에서 이 노래를 틀어주고 강제로 칼퇴근을 시킨다면 직장인들의 애사심이 하늘을 찌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야근은 우리나라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게 아니라 밥을 야근하듯이 먹는다고 표현해야 할 지경이다.

집에 가지 못하는 건 법조인들도 다르지 않다. 지난 19일 서울 김모 검사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 검사가 남긴 유서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쉬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작년 8월에는 서울 이모 판사가 호흡곤란으로 사망하였는데 유족들은 이 판사가 업무과다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우리가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을 할 수 있던 것은 국민들이 장시간의 노동시간을 감내해준 덕분이었다. 관성이란 무서운 것인가 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음에도, 근로시간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업주와 근로자를 감독해야 하는 정부도 야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처벌 권한이 있는 검찰, 법원도 밤에 불 꺼질 날이 없다.

일이 많으면 그만큼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 정규 근로시간에 일을 다 끝내지 못한다면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인력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부든 회사든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청년 실업률은 계속 올라가는 아이러니가 이어지고 있다.

잘못된 문화도 과도한 근로시간의 원인이다. 일이 없어도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는 문화, 남들을 따라가지 못하면 가혹하리만큼 배제시켜 버리는 경쟁 분위기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수직적이고 기계적인 상하관계도 근로자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일을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만든다.

OECD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의 연간 근로시간은 2124시간이다. 우리보다 많은 나라는 2228시간인 멕시코가 유일했다. 회식과 행사가 잦고, 휴식시간·휴일을 불문하고 SNS나 메일을 통하여 업무 지시와 보고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근로시간은 OECD 최고라고 봐도 무방하다.

직장인을 집으로 보내는 문제는 단순히 휴식권 차원을 넘어 거기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탈출구 없는 만성피로에 익숙해져 있다. 초등학생들조차 사교육에 시달리며 수면부족을 겪고 있다. 밤늦게서야 번아웃 상태에서 만나는 가족들에게 불화가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번아웃 증후군은 무기력증, 자기혐오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분노범죄와 자살이 증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출산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근로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가족이 함께 보낼 시간이 부족하고, 주말만 되면 잠을 보충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출산율 제고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프랑스, 독일에서는 야근을 법에서 엄격하게 규율하고 있다. 2013년에는 프랑스에서 직원에게 야근을 시킨 애플 판매점이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야근을 하면 동료들에게서 ‘노동자들이 힘들게 쟁취한 권리를 훼손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그들은 미쳤다. 한국인들’이란 책의 저자 에릭 쉬르데쥬는 “한국 기업은 일과 목표 달성만이 개인의 존재 이유였고, 개인적인 삶은 무시됐다”고 따갑게 지적한다.

제도와 인식에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충분히 쉬고, 소비활동을 하며, 일거리 분담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선순환을 이루어 갈 수는 없는 것일까. 가족과 식사할 시간, 아이와 대화할 시간, 책과 음악을 즐길 시간을 유예한 채, 일에만 몰두하면 행복해 지는 것일까. 잘 사는 사회를 넘어 이제는 인간답게 사는 사회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되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가자. 오늘 할 일은 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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