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흥우

수필가·시조시인

나는 매주 수요일이면 산을 찾는다. 날씨가 나쁘지만 않으면 산을 찾아 걷기도하고 숲 속에 앉아서 멍하니 있다가 오곤 하는 일이 십 수년을 계속하다보니 동지들도 생겨서 이제는 함께 어울려 산행 시작과 쉴 참, 정상 등 여러 핑계를 대가며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는 재미까지 곁들여져서 더욱 즐거운 상행이 되었다.

산은 큰 스승님이라는 생각을 갖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산은 어디를 가도 울울창창하여 산길을 걷노라면 그저 흐뭇하다.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가지각색으로 나와서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중에 몇 가지는 의문이 풀리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상당부분은 꾸준한 산림녹화사업으로 식목을 해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다양한 나무의 숲이 만들어진 데는 먼저 다람쥐와 청설모의 공로를 들 수가 있었다. 다람쥐는 그 넓은 산야를 누며가며 도토리나무의 여러 종류들을 심어놓았다. 어디를 가나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들을 찾을 수 있게 골고루 물어다가 식목을 해놓았다. 청설모가 잣나무를 심어놓은 솜씨는 놀랍기까지 하다. 게다가 소나무, 피나무, 신나무, 단풍나무 같은 날개 달린 씨를 만드는 솜씨의 나무들은 바람을 타고 고루 퍼졌을 거라는 것도 짐작이 간다. 그렇지도 못하면 자신을 새나 동물에게 먹히는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제 자손을 옮기는 비상수단을 썼을 벚나무며 팥배나무 찔레나무들의 악착같은 프로정신도 배울 만 하다. 그 밖의 다른 것들도 그 어떤 솜씨를 발휘해서 골고루 삶의 영역을 넓혀서 어떤 나무는 예쁜 꽃으로 시선을 자극하고 그윽한 향기로 코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나무 밑을 살폈다. 산나물 생각이 나서였다. 염아자며 원추리 참취, 삽주 등 즐겨 먹었던 산나물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 전에 민둥산에 가깝던 시절에는 오히려 많이 채취하던 그 장소를 찾았지만 키 내기하는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찾지를 못했다. 심지어는 소나무 밑에는 작은 소나무도 없고 참나무 군락지에는 자라나는 어린 참나무가 없었다. 그 수많은 도토리들을 산짐승들이 먹어치워서 싹틔우는 도토리가 하나도 없는 것인가. 낙엽을 뒤져봤다. 소나무 씨앗이야 작아서 찾을 수 없지만 만나는 토리는 싹틔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타감작용 때문이었다. 식물들이 독특한 화학물질을 내보내면서 자신의 밑에서는 제 자식까지도 자라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필요한 것은 잘 자라게도 하는 식물들이 다른 생명체에 대하여 감각적 느낌으로 발산하는 생존의 욕심 때문이었다. 식물들의 타감작용은 수수만년 이어져왔겠지만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1937년 오스트리아 출신 한스 몰리슈가 논문을 발표하고 부터다.

그러고 보니 나무들의 생존경쟁이 사람들의 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도 누가 큰 인물인가 눈치를 보아가며 그 그늘에서 무슨 은덕이라도 입어볼가 서로 경쟁을 하지만 기실은 엉뚱한 곳에서 성장한 새로운 인물이 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여러 경우에서 볼 수가 있었다. 바로 식물처럼 사람도 타감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타감작용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큰 그늘에 머무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인다. 왕대 그루에서 왕대가 난다고는 하나 그 것은 왕대 밑이 아니라 어떤 왕대의 그루인 것이다.

타감작용은 모든 생물의 공통된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늦깎이로 알게 되었으니 멀리 떠날 좋은 바람이나 기다려야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