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길

환동해학회

편집위원장

이번 주에는 한국전쟁(6·25)이란 역사적 사실과 직면해야 한다. 매년 이 날이 돌아오면 전국적으로 이 날을 추념하기에 바쁘다. 한국전쟁 기간 중 어느 마을이든지 생채기 없는 마을이 있었겠는가만은,그래도 이날에 특별히 어느 한 마을을 꼽아 본다면 필자는 양양군을 손꼽고자 한다.

양양은 강원도에서 강릉,삼척과 더불어 영동지역에서,특히 영북지방의 가장 큰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도호부가 있었던 큰 고을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곳이 양양군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꿋꿋하게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왔던 그 흔적은 양양군 곳곳에 그 정신이 어려 있는데,해방 이후 38선이 양양군을 가로지르면서부터 본격적인 아픔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일제라는 타도의 목표가 외국이었지만,해방 이후에는 우리 민족끼리 이른바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38선이 그어졌다. 하필이면 38선이 양양군을 가르고 있었다.

현북면 잔교리는 이남,현북면 기사문리는 이북이 되었다. 어제까지 왕래하던 문화공동체가 강제로 갈라지는 불상사가 생겼다. 이렇게 양양군에서 떨어져 나온 지역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전쟁이 발발했다. 유엔군이 투입되었다. 유엔군은 한국군을 예하부대로 두는 최상위 군령권을 지닌 최고사령부였다.

유엔군의 목표는 38선까지를 회복하는 것이지,그 이상 진격하는 것은 불허했다.

그렇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하여 이 기회에 통일된 한국을 만들기를 소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을 넘어 진격하기를 주장했으나 유엔군에서 승인하기는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한국군이 작전권을 갖고 있던 영동지역에서라도 북진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당시 영동지역을 맡았던 한국군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북진하라. 38선을 넘으라. 그 날이 바로 10월 1일이었고,후에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국군의 날’에는 양양군을 가로질렀던 ‘38선’이란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신개념이 담겨있는 것이다.

양양군은 이로부터 수복이 되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쟁은 양양군 곳곳에서 이루어졌고,그 아픔은 민중들이 가장 많이 갖고 가야 했다. 1·4후퇴 당시 적들에게 머물 곳을 주지 않으려 집들을 불태웠던 사건은 아주 유명하다. 이렇게 불태웠던 집들은 양양군 전역과 주문진읍 향호리까지 이어진다.

휴전 후 양양군은 미군정이 통치하는 곳이 되었다. 대한민국 곳곳이 대한민국의 통치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양군만은 미군정의 통치하에 수년여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그래서 양양군으로 진입하는 차량은,사람은 주문진 향호리 검문소에서,또 38검문소에서 헌병들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런 잔재는 미군정이 완전히 종식된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져 1980년대까지도 검문검색이 심하여 마치 양양군 사람들을 외국인처럼 만들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주문진읍 향호리를 지날 때면 군경 검문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 편입된 양양군은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 때문에 또 한 번 정체성이 크게 흔들린다.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곳 속초리가 점차 세력이 커지더니 속초시로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 군세는 미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역사 속에서 양양군만큼 고통을 당한 군(郡)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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