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문학박사

처가가 강릉이여서 일 년에도 몇 번씩 대관령을 지난다. 예전에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가 잠시 후에 왼쪽으로 돌리기를 수 없이 반복하다가 성산면 어흘리를 통과하고 나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대관령을 오를 때면 신사임당 시비가 세워진 곳에서 시를 읽고 동해 바다를 실컷 보고나서야 횡계로 향했다. 심하게 구부러진 길이 위험하긴 했지만 이 길을 지났을 선인들을 생각하고,김홍도의 그림과 비교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7개의 터널을 순식간에,그리고 무미건조하게 재빠르게 달릴 뿐이다. 가끔 옛길로 핸들을 돌리기도 하지만 빠름에 익숙해져 터널 속을 달리곤 한다.

어린 시절 고개는 무서웠다. 고개를 지날 때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며 호랑이가 나타날 것 같았다. 집과 초등학교 사이에 조그마한 고개가 있었다. 힘들지는 않았지만 비만 오면 귀신이 나타난다는 말에 대낮에도 뛰어서 지나갔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사라졌다. 이웃 마을과 연결되는 높은 고갯마루 성황당 옆엔 노송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돌을 주워 던지고 내달리곤 했다. 벗겨진 고무신을 다시 가지러 갔다가 올 때는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누가 고갯길을 좋아하겠는가?

고갯길은 불편한 장애물로 여겨졌다. 직선으로 펴거나 여의치 않으면 뚫는 것이 능사가 되었고,터널의 길이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고개 밑으로 터널이 생겨나면서 고개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잊혀져갔다.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무엇을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간은 생략되고 목적지만 남게 되었다.

미시령은 바람의 고개였다. 지금은 폐쇄된 미시령 휴게소에 들른 적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몸이 휘청거렸다. 거센 바람 속에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장난삼아 점프하면 진짜로 내 몸은 몇 발자국 밀려나곤 했다. 동해에서 불러오는 바람이 맹렬하게 달려와 모든 것을 날려 보냈다.

설악산 유산기(遊山記)를 따라 걷다가 미시령을 찾았다. 미시령은 예전부터 있었으나 너무 험준하여 폐지하였다. 그러다가 1493년에 양양의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아서 다시 이 고갯길을 열었다. 그 뒤 조선 말기에 다시 도로가 폐쇄되었다가 1960년경에 개통되었다. 그러나 한계령이 넓게 뚫리면서 이곳을 넘나들던 차들은 한계령으로 향하게 되었고,미시령터널이 개통되면서 그나마 미시령을 넘는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가 되었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표지석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섰다. 오던 길을 돌아보니 서쪽으로 끝없이 겹쳐진 산만 보인다. 아침 안개 때문에 계곡은 하얗게 잠기고 봉우리들만 머리를 내민다. 어떤 시인은 “서쪽엔 검은 눈썹 점점이 모여 있다”고 하였다. 표지석 옆에 고개의 유래와 이식(李植)의 시가 적혀있다. 이식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미시령을 넘나들었고,정상에 오른 감격을 시로 남겼다. 이식은 장편의 시 뒷부분에 “광대하도다 미시령이여,천지간에 그 무엇이 그대와 짝하리요”라고 한껏 고조된 감정을 토로하였다. 어떤 사람은 미시령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동쪽에 흰색 깊은 물 쏟아 놓았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파도가 속초 땅 끝나는 지점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길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고개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고개를 넘으며 눈길을 돌리면 길가의 바위에,그 옆 계곡과 폭포에 선인들이 남겨놓은 사연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시도 있고 기행문도 있으며 전설도 말을 건넬 준비를 하고 있다. 고갯길엔 역사와 지리,문화가 굽이굽이 서려있다. 인문학적 관심을 충족시켜준다. 단 땀을 흘린 만큼만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원도엔 어딜 가나 고갯길이 있으니 장애물이 아니라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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