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욱현

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색하고 말하는 걸 싫어한다. 같은 말이라도 식사하며 아님 술자리에서 좋은 분위기에서 얘기해주길 기대한다. 뭔가 회의 테이블에서 정확히 용건만 듣고 나면 관계에 있어 결핍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심성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온정주의’라 하여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런 예는 어떤가? 우리의 고전 작품에는 희극적 요소가 필수적인 것처럼 꼭 가미된다. 심청전에는 뺑덕어미,놀부에게는 말대답 잘 하는 마당쇠를 함께 붙여놓았다. 방자와 향단이 빠진 춘향전을 상상할 수는 없다. 왜일까? 우리의 선조들은 악인을 절대 악인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다. 희극적 요소는 그 악인을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공동체에서 내쫓는 게 아닌 도리어 웃음을 통해 남아있게 한다. 서양 드라마에서처럼 악인을 응징하고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권력을 사리사욕에 사용한 그 나쁜 변사또도 눈 앞에서 징벌하는 게 아닌 겨우 ‘하옥’이다. 이건 뭔가 정말 큰 이야기다.

연극계 원로이신 극단 목화의 대표,오태석 선생은 늘 우리 민족의 극 이론을 펼치실 때 ‘틈’을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 문풍지를 보라. 바람을 막는 수준이 완벽한 밀봉이 아니지 않느냐. 막기도 하는데 바람은 슬슬 다 들어온다. 그게 우리 의식에 깊게 깔려있다는 것이다. 맞다. 우리 민족은 ‘틈’을 좋아한다. 웃음을 통해 그 틈을 찾으며, 그리고 그 틈을 우리 삶 여기저기에 심어놓고자 한다.

틈은 생각해보면 여지이고 여유이다. 너도 들어와야 하지 않겠느냐. 문풍지의 말이다. 춥다고 완벽하게 밀봉해버리면 공기는 어디로 들어오며 방안 나쁜 공기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 적당히 막아서 안과 밖이 적당히 숨을 쉬어야 한다는 한국문풍지의 주장같다. 그건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항아리는 플라스틱 용기가 아니며 숨을 쉰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늘 항아리를 닦아주곤 했다. 안에 들어있는 된장이 새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주변을 둘러보니, 정녕 우리 민족은 틈을 지혜롭게 이용할 줄 아는 민족이다. 틈이 허술함이 아녔던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필자가 들은 얘기로, 충청도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내일 오후에 봐…’ 한단다. 이런! 몇 시에 보잔 얘기지? 근데 그래도 약속이 된다고 한다. 오후에 적당한 때 보는 것이다. 못 보면 말고. 아,그건 어쩌면 약속과 동시에 배려 아닐까. 그래서 틈을 주고 받는 관계는 편안하다. 그걸 단순히 비겁한 사람들의 평화유지법으로 몰아세우는 건 온당치 않다. 도리어 틈을 보여주는 사람의 한 마디는 더 엄중할 수도 있는 것이다. 틈은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사에서 여지를 지우면 충돌밖에 뭐가 남겠는가. 틈의 미학이 우리 사회 법률이나 제도에 스민다면 한국만의 독특한 이즘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속한 건 반드시 서로 지킨다는 사회적 합의 그리고 동시에 배려가 있는 사회. 물론 그 틈이 일부 이용 가능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공연을 다니며 강원도 극장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 간혹 듣는 얘기가 있다. 강원도 관객들은 반응이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잘 웃지 않는단다. 실제로 유명한 뮤지션들이 강원도에 와 충격을 먹었단 얘기도 전했다. 객석 반응이 너무 없어서. 왜일까? 섣불리 호의를 보이지 않으며 불의의 적의를 늘 대비하는 관망 같은 것일까. 하지만 그 살핌과 경계가 때로는 배타적인 텃세나 이기심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통념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 강원도 객석이 변하고 있다. 환히 웃는다. 그렇다. 지금의 시대는 소통이 대세이다. 소통은 서로 틈을 보여주는데서 시작할 수 있으며 그건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물질의 여유가 아닐 것이다. 강해서 여유가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여유가 있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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