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수
춘천지법 국선전담변호사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해야겠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반장이 되었다. 투표로 반장을 뽑는 게 당연한데 담임은 투표 없이 나를 반장으로 지명했다. 학생들은 동요했지만 담임의 강압적인 태도에 금세 잠잠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담임의 정보원 노릇을 했다. 학교나 선생님들을 욕하는 학생은 나를 통해 담임에게 보고됐다. 담임은 나를 이용해 학급을 통제했고 면학분위기 조성이라는 명분에 나는 충성했다. 중1 이후에 내가 반장을 맡지 않은 건 ‘관선반장’이라고 조롱당하던 트라우마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사회에도 ‘관선반장’을 이용한 언로(言路) 통제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사회의 여러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인가 의도대로 흘러간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개그 프로에서 정치 풍자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정부에 날선 발언을 하던 방송인, 언론인은 노출 빈도가 줄어들다가 개편을 즈음하여 결국 밀려났다. 권력자의 기자회견은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졌고, 권력자를 비판한 사람은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어 무죄판결을 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우연의 연속은 필연이라고 했던가. 국경 없는 기자회에서 2016년 발표한 한국의 언론자유는 세계 70위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최근 세월호 관련 보도개입 논란에서, 당사자의 해명은 ‘통상적인 업무 협조였다’는 것이었다. 언론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통상 업무’였다는 말처럼 들린다.

제헌절을 앞두고 헌법전을 다시 읽어 본다. 언론·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가 유독 눈에 걸리는 건, 아픈 사람이 약을 찾게되듯 우리사회의 병든 부위가 표현의 자유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유는 탄압당할 때보다 탄압당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욱 위축된다. 통제의도가 명확할 때는 똘똘 뭉쳐 저항하고 자유를 외칠 계기가 되기도 한다. 눈에 띄지 않는 감시와 불안감은 알지 못하는 사이 암세포처럼 의식을 갉아먹는다.

故 신해철씨는 한 토론회에 출연하여 ‘현 정부를 주제로 토론한다니까 큰일 난다, 보복 당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위협감을 느낀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민들은 SNS가 권력기관에 감시당한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해외 SNS에서 더 활발히 소통을 한다. 포털 사이트의 댓글 하나에도 누군가 돋보기를 들이대고 정치성향을 분석하지는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 감시에 대한 불안이 LTE망처럼 우리 의식에 뻗쳐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동물이다. 표현함으로써 사상을 교류하고 자아를 드러내고 존재를 확인한다.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릇된 사상까지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옳은 말만 하라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오류에 제재가 따른다면 자기검열이 일상화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도 한계는 있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명예훼손으로, ‘의견이나 감정’을 이야기하면 모욕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발언이란 사실 아니면 의견·감정이 전부다. 자유의 제한이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해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는 없다. 더구나 그 제한의 한계를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정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형해화되고 말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보도 방향에 그들이 ‘업무 협조’를 요청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사회는 이상하게도 표현, 사상, 양심의 자유 등 헌법상 기본권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순간 탄압을 당하기 쉽다. 헌법은 비석에 새긴 멋들어진 학교 교훈과는 다르다. 우리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생활 규범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헌절을 기념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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