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강하

강원대 HK연구교수

여름은 바야흐로 공포영화의 계절이다. 한여름의 무더운 열기를 등줄기가 서늘하도록 무서운 이야기로 식혀보려는 노력 덕분에,수많은 공포영화가 제작되었다. 벌써부터 극장가에는 청소년관람불가라는 붉은 딱지가 붙은 공포영화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납량물의 단골 소재는 밤마다 피를 흘리며 나타나는 원귀들이다. 우리나라 영화에도 좀비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우리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들이다. 고전소설인 장화홍련전,밀양 지역에 전해지는 아랑전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들이다. 장화와 홍련,아랑은 이승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원귀들이다. 이 소녀들은 억울하게 죽어 연못에 던져지거나 대나무 밭에 비참하게 버려졌고,죽은 후에는 부도덕하다는 추문까지 더해졌다. 그러니 억울할 만도 하다.

너무 억울해서 이승을 떠나지 못하던 소녀 원귀들이 찾아간 건,다름 아닌 마을의 부사였다. 귀신을 보고 기겁한 부사들이 줄줄이 초상을 치르는데도 그녀들의 분투는 멈추지 않았다. 사실,소녀 원귀들도 미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 억울해서 말이다.

괴담,납량특집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담력이 큰 부사들이 부임하면서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부사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해자들을 처벌하고,소녀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준다. 이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은 그 마을에 밤마다 처녀귀신이 나타난다는 흉흉한 괴담이 사라졌다는 엔딩으로 이어진다. 죽은 몸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소녀들은 끝내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우리의 옛 전래동화나 전설에는 처녀귀신들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남녀의 차별이 지엄하던 시절,소녀들은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사회적 약자였다. 장화와 홍련,아랑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는 법(法)의 심판이었다. 소녀 원귀들이 무당이 아닌,부사를 찾아간 이유일 것이다. 그녀들의 해원(解寃)은 살풀이나 씻김굿이 아니라,공정한 법의 심판에서 이루어졌다.

이틀 후면 제헌절(制憲節)이다. 우리나라의 법적 초석인 헌법이 제정된,그야말로 뜻 깊은 날이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헌법 11조)하고,“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10조)는 아름다운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 사회적 약자인 21세기의 장화와 홍련도 행복 추구의 권리를 가진 존엄한 인간인 ‘모든 국민’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법(法)이라는 한자(漢字)는 흥미롭다. 글자를 풀어보면 물처럼(水) 흘러가게(去)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두어지지 않은 물,스스로 흐르는 물은 도도하며 세차다. 온갖 더러운 것을 쓸어 담으면서도 생명을 기르는 데 소홀함이 없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노자(老子)의 담백한 언어는 법(法)의 단정한 위엄을 떠올리게 한다.

정말 무서운 공포물은 피칠을 한 원귀들이 돌아다니는 영화나 소설이 아니다. 죽어서도 억울함을 풀지 못한 사람들의 사연이 반복되는 현실이야말로 매일 반복되는 진짜 납량물이다. 오늘도 뉴스와 신문에는 검찰과 경찰,고소인과 피의자가 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실려 있다. 그 짧은 사연 안에는,억울한 사람들의 호소와 눈물,끔찍한 비명이 뒤섞여 있다. 여름뿐이랴,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현실 속의 납량물은 이제 사양하고 싶다. 서늘하고 답답한 사연,죽음에 내몰릴 정도로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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