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원

소설가

나는 강릉에서도 대관령 아래 벽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일 년에 한번 단오 때 가보는 강릉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인 줄 알고 자랐다. 그런 나에게 양양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또 다른 미지의 어떤 도시와도 같았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양양을 단지 지명으로라도 알게 된 것은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였다. 어느 날 그 어른이 자신이 젊은 날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로 그때 강릉에는 기차가 없었는데 양양에는 서울로 가는 기차가 있었다고 했다. 강릉에 기차가 들어온 것은 1962년의 일로 강릉보다 남쪽에 있는 삼척에서 북쪽으로 연결되어 들어온 것이고,양양에 있던 기차는 1937년 원산에서 남쪽으로 아래로 연결되어 온 것인데,그 어른은 이 기차를 타고 원산도 가고 서울도 가고 함흥이며 청진을 그야말로 내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오래도록 잊고 있다가 언젠가 이상국 선생이 쓴 선생의 고향 양양 이야기 속에 다시 이 기차 이야기를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양양 출신의 이상국 시인의 시는 알아도 선생과 직접 알고 지내지 못했다. 서울에서 여러 문인이 모인 자리에서 지나가듯 한 번 인사를 드린 정도였다. 그때 나는 새파랗게 젊었고,선생도 40대의 젊은 나이였는데 뭐랄까 매우 단아하면서도 훤칠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때에도 검은 옷을 즐겨 입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긴 다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재두루미 같은 인상이었다.

서로 왕래의 교류는 많지 않았어도,그보다 깊은 교류 하나가 나와 이상국 선생 사이에 있었다. 얼마 전 나는 양양을 무대로 한 단편소설 한 편을 썼다. 내 소설 속에서 그곳은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1980년대의 광주가 특별한 지명인 동시에 특별한 기호였듯 한국 전쟁 중의 양양 역시 그런 공간 중의 하나였다.

1945년까지는 일제치하 지역이었고,해방되면서 소련이 들어오면서 38선 남쪽과는 달리 소련군정을 겪는다. 그런 다음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한국전쟁을 맞게 되고,전쟁중에 한국군의 북진이 있었고,1·4후퇴 때 다시 인민군이 점령하고,다시 한국군이 재북진하면서 수복되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미군정을 거친다. 그러다가 1954년 미군정에서 한국정부로 행정수복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일들이 오늘날에는 어떤 상처로 남았는가를 소설로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쓸 때 이상국 선생이 쓴 고향 양양 이야기를 많이 참고했다. 1945년 해방이 된 다음부터 1953년 휴전협정 이후까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분단과 전쟁으로 수차례 체제 변동을 겪었다는 이야기 속에 나는 다시 쓸쓸하고도 고독한 두루미와도 같은 인상의 이상국 선생을 떠올렸다. 그 안에는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지만 ‘한 지역의 슬픈 연좌제’ 이야기도 있었다.

인터넷이 일상화된 다음,그리고 사람마다의 손에 스마트폰이 지남철처럼 붙어 있게 다음부터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40년간 한결같이 시를 써온 사람은 어떤 향기로 이 세상을 살아갈까. 꼭 강원도 시인이여서만이 아니다. 늘 작품에서만 보고 작품으로만 가까웠던 분인데 그의 시 속엔 역사의 상처를 쓰다듬는 그만의 깊은 향기가 있다.

그는 정말 한겨울 설악의 추위 속에서도,또 모든 추수를 끝낸 빈 들판에서도 긴 다리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재두루미 같은 시인이고 또 신사이다. 그의 40년 시인 생활을 축하드리고 또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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