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지난해 1월10일(토) 오전 11시7분.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이 주말 오전의 정적을 깨고 춘추관 기자실에 들어섰다. 그는 두 문장의 브리핑 자료를 묵묵히 읽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표가 오늘 오전 수리돼 오늘 자로 김영한 수석이 면직 처리됐습니다. 어제 사표가 제출됐고 김기춘 비서실장이 올린 서류를 대통령께서 오전 재가하셨습니다”. 기자들의 후속 질문이 이어졌지만 민 대변인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전후 사정은 이랬다. 2014년 11월 정윤회씨 등의 국정농단 의혹을 담은 청와대 문건이 공개돼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국회는 당시 김영한 민정수석의 출석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국회에 출석해 설명할 만큼 문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며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김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항명 파동은 김 수석의 사표로 일단락됐다.

현 정부 청와대에서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낸 조응천(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1일 한 언론에서 주목할만한 발언을 했다. 조 의원은 “청와대 문건파동이 터진 후 김영한 수석은 관련 사건 처리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고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김 수석을 바이패스하고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했다고 들었다. 당시 야당은 민정수석의 국회 출석을 요구했고 김 실장이 김 수석에게 출석하라고 지시했지만 김 수석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못 나간다’ 말하고 사표를 던진 것이다. 국회에 나가 ‘우 비서관이 (김 실장과) 왔다갔다 했지 나는 몰랐다’고 말하기도 난감하고 전혀 모르는 일을 아는 것처럼 하기도 난감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발언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들은 정보기관 등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를 운영했다. 정보기관이 상석에 앉는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그 흔적이다. 오늘날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칼과 방패는 검찰이다. 검찰은 최고 법 집행기관으로서 범죄를 수사하고 사법경찰관을 지휘·감독하며 공소(公訴)를 제기·유지하고 재판집행을 지휘한다. 아울러 여러 행정부처의 법치행정을 자문 혹은 감시하며 공직에 대한 사정도 맡고 있다. 정권은 검찰을 통해 공직의 기강을 잡고, 여·야 정치권을 견제하며, 재계를 길들인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대통령과 검찰을 이어주는 창구다. 민정수석이 정권의 실세이자 보루인 이유다. 박근혜 정부들어 곽상도(2013년3월~8월·대구), 홍경식(2013년8월~2014년6월·경남마산), 김영한(2014년6월~2015년1월·경북의성), 우병우(2015년 1월~현재·경북봉화) 등 역대 민정수석들이 전원 영남출신인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박 대통령도 검찰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대 최강의 실세 비서실장으로 기억되는 김기춘 실장(2013년8월~2015년2월)은 검찰총장, 법무장관, 3선 국회의원으로 법제사법위원장까지 지냈다. 검찰에서 그의 위상과 권위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검찰을 장악한 김 실장을 통한 국가 운영은 힘이 실렸고 공직, 정치권, 재계가 청와대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수하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홍경식·김영한은 힘을 쓸 수 없었다. 김 실장은 지난해 2월27일 청와대를 떠나기 한달 전인 1월23일 항명파동으로 청와대를 나간 김영한 수석 후임에 우병우 민정비서관을 전격 발탁했다. 비서실장과 민정비서관으로 코드를 맞춰온 사이였다. 김 실장을 대신한 우 수석이 ‘리틀 김기춘’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하루가 다르게 득세한 결과가 오늘로 귀결됐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2014년 5·6월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 등으로 야권의 강한 사퇴 압력을 받던 김 실장이 청와대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이듬해 2월이다. 과실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에게 그만큼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다. 우 수석의 사퇴가 더딘 이유이기도 하다. 26일 시작된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의 우 수석에 대한 조사가 사퇴의 계기가 될지 아니면 유임의 면죄부가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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