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과 생일, 기념일 등에 초대받으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선물을 받을 때도 예외가 아니다.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 드세요’, ‘변변치 않습니다’, ‘약소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등.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간 큰 코 다친다. 가령, ‘음식이 가지 수만 많네요’, ‘이런 걸 왜 주시나요’, ‘흔히 보는 거네요’라고 말했다면? 멱살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대접 또는 선물을 받는 입장에서는 “진수성찬이네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또는 “이렇게 귀한 걸 다 주시다니…”라고 해야 한다. 이게 ‘한국식 예절’이다.

고종과 민비의 주치의였던 앨런박사는 한국 사람들의 격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인 하인에게 그가 갖기를 원했던 물건을 주었을 때 그는 ‘노(No)’하며 받지를 않았다. 한국인의 ‘노(No)’가 예스(Yes)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라고. 본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감추는 것이 미덕인 한국사회의 오랜 습속을 엿볼 수 있다. 요즘도 이 같은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분수에 넘치는 선물을 건네면서도 “이거 변변치 않지만…”이라고 하고, 받는 사람은 내심 기쁘면서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 서로의 손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헌법재판소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한국사회의 ‘접대·선물문화’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지난 2010년 내연남의 고소사건을 청탁해준 대가로 벤츠승용차 임대료 등 5591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사건이 빌미가 돼 제정된 김영란법은 많은 논란 끝에 ‘3·5·10 선물·접대문화’를 잉태했다. 식사는 3만원, 선물은 5만원, 경조사비는 10만원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어기면 범법자로 낙인찍히고.

‘벤츠 여검사 사건’에서 김영란법으로 오기까지 우리사회는 수많은 부정부패사건으로 얼룩졌다. 고 성완종의원의 폭로와 자살에 이어 이완구총리가 기소됐고, 수십억 원대 법조비리가 터지면서 전현직 부장판사와 검사장이 구속됐다. 이들이 관여한 돈의 액수는 ‘3·5·10만원’이 아닌 수십, 수백억 원. 김영란법이 거악을 단죄하기보다 선량한 우리 이웃의 심성만 사납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려면 정치가 바로서야 하는데….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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