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그날 새벽도 이날과 같았으리라.보름을 막 지난 휘영청 둥근달이 송백을 휘감아 도는 솔바람과 남녘 바다에 물비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하늘과 바다가 한 빛이었는데 때이른 한기가 얼핏얼핏 불어와 창을 넘나 들었다.19일 새벽 한산섬 두을포가 그랬다.삼도수군통제영에서 이름을 얻은 통영에서 배로 20분 들어가는 한산면 두억리는 저녁 6시30분 막배가 떠나고 나면 한산도(閑山島)다.교통편이 끊기고 인적도 사라져 다음날 첫배가 들어오는 아침 7시30분까지 섬은 물새,달빛,바람이 주인이다.‘큰 바다에 가을 빛이 저무니 찬 기운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나는구나.걱정하는 마음에 밤새 잠 못이루고 뒤척이는데 새벽 달이 창에 들어 활과 칼을 비추네’ 1595년(을미년)10월20일 전장에 홀로 선 통제사 이순신은 이렇게 기록했다.이날 새벽이 그날과 같았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1592년(임진년) 7월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수군에 대승을 거둔다.한산대첩이다.이듬해인 1593년(계사년) 7월14일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 두을포로 옮겼다.그해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된 통제공 이순신은 섬에서 주민들과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구으며 수군을 조련하고 전선을 건조했다.1594년(갑오년) 3월 당항포,9월 장문포,10월 영등포·장문포의 연전연승은 섬에서 도모하고 준비해 거둔 승리였다.3년8개월여 동안 일본수군의 북상을 차단하고 호남과 충청의 곡창을 보전했다.1597년(정유년) 2월 선조의 의심병이 도지고 원균의 모함이 독기를 뿜었다.통제공은 삭탈관직과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이순신 없는 섬은 홀로 설 수 없었다.정유년 7월16일 장수를 잃은 조선수군은 거제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했다.원균이 자초한 졸전이었다.섬은 유린당하고 지휘본부였던 운주당(運籌堂)도 소실됐다.한산도는 그렇게 잊혀졌다.

이순신의 한산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정유참변후 142년이 지나 1739년(영조15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섬을 찾았다.백성들을 차별하지 않고 역민(驛民)들에게도 선정을 베푸는 이순신을 사모하는 인물이었다.조경은 한산섬에 올라 ‘수백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넘어 우거진 송백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운주당 옛 터를 가리켜 주니 백성들은 이같이 오래도록 잊어 버리지 못하다 보다’라며 눈물을 지었다.그는 흙을 쌓아 터를 돋우고 운주당 터에 제승당(制勝堂)을 짓고 돌을 다듬어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충무공 이순신을 기렸다.조경과 동행한 도사 정기안(鄭基安)은 비에 ‘충무공을 사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비를 세울 것이며 진실로 사모하는지라 반드시 본받을 것이며 진실로 본받는지라 반드시 충성되고 의로울 것’이라고 기록했다.

남도에 병이 깊어 기자는 17일 오후 한산섬을 찾았다.이틀동안 섬에 머물며 김상영(金尙映) 제승당관리사무소장의 안내로 충무사에 모셔진 충무공 영정에 분향하고, 수루(戍樓)에 올랐다.충무공이 부하 장수들과 활 시위를 당기던 한산정도 돌아봤다.섬은 통제사 조경이후 236년이 지나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부터 1년여에 걸쳐 사적지 정비사업을 펼치며 새롭게 태어났다.박 대통령은 이 기간에 세차례나 한산섬을 찾아 나무 하나,풀 한포기,기와 한장을 꼼꼼히 챙기며 충무공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또 공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세세손손 전해지길 기원했다.오는 9월이면 40주년을 맞는다.요즘 한산섬은 공의 유훈을 기리는 손길이 한창이다.국민들이 애민애국 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충무공의 숨결과 체취를 담아내는 정성이 가득하다.지난 19일 아침 섬과 작별할때 밤새 나라 걱정에 수루를 홀로 서성이는 장군의 환영을 뵈오니 머리를 깊이 숙여 큰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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