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고 사악한 세상 잇단 폭력
바닥에 낮게 엎드린 벌레의 시선

▲ 벌레신화
이재훈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당신의 기별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는 날들.먼 시간을 건너왔을까.천 년 전부터 서로의 몸을 기억했을까.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 텐데.쏟아지는 빗속을 뚫고,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짐승의 피’ 중)

영월출신 이재훈 시인은 세 번째 시집‘벌레 신화’(민음사)에서 쏟아지는 폭력에 대해 등을 말고 웅크린 채 견디는 식물적 능동에 대해 말한다.비극적인 현실을 살아 내기 위해 환멸을 끌어안고 더욱 적극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방식을 택한다.땅바닥에 가장 낮게 엎드린 벌레의 목소리로 이 세계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온 시간을 다해 살아온 이 세계는 부패했고,무너졌다고 강조한다.그야말로 폐허다.‘꼰대들’과 ‘위정자들’로 가득하다.그토록 비겁하고 사악한 세계를 살아온 시인은 지쳤다.그러나 시인은 무너진 곳에서 다시 기도를 시작한다.환멸을 느끼지만,끝내 포기하지 않는다.이렇게 오래 나쁜 채로 있던 세상이 과연 바뀔까 하는 의심을 하지만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 오래오래 기도하면 된다”고 결론 내린다.‘오래오래 기도’ 하는 것.그것은 ‘당신과 내’가 바꿀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세계에 남은,세계를 바꿀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시인은 전쟁과 같은 폭력에 의해 무너진 세계가 사랑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저자 이재훈은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명왕성 되다’가 있다.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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