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보라(김교극 21사단 포병연대 상사 부인)

▲ 신은보라(김교극 21사단 포병연대 상사 부인)

28살.너무 어리고 철없는 나이도 아닌,사회생활도 몇 년 해서 나름 어른에 가까워지는 나이에 신랑을 처음 만났다.군대를 다녀온 후 옆 반으로 발령받아온 중위 출신의 동갑내기 직장 동료가 소개팅을 주선했고 나는 얄팍한 속내를 가지고 나갔다.‘에이,뭐 그냥 나가서 밥이나 얻어먹고 와야지~무슨 소개팅으로 인연이 잘 이어지겠어?’

그렇게 간단하게 밥 한 번 얻어먹으러 나간 자리에서 이어져 나는 평생 그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내가 그 남자는 아닌지라 그의 정확한 속내까지는 묘사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해맑고 순수한 미소에 호감이 갔다.그 남자의 미소는 맑고 깨끗한 아이 같았다.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동계훈련을 마치고 눈밭에 까맣게 그은 그의 얼굴에 하얀 치아가 너무 돋보여 그 미소가 그렇게 화사해 보였을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그렇게 남들 다하는 알콩달콩한 사랑을 했고 그 과정 중에 군인이란 직종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나는 하나하나 익혀나갔다.물론 일반인의 관점에서 이해가 안 될 때도 너무 많았다.왜 북괴가 도발하면 그의 휴가가 취소되어야 하는지,왜 꼭 북괴는 크리스마스나 중요한 기념일 직전에 도발하는지,또 유격훈련,국지도발훈련,무슨 무슨 훈련 등등 말해줘도 외우지 못할 만큼 훈련은 또 어찌나 많은지…. 무수히 많은 단념과 포기의 시간이 지나 우린 드디어 청첩장 초대글에 이야기를 담았다.



#교극이는 우리나라를 지키고 은보라는 우리나라의 미래 꿈나무들을 키웁니다.이제,교극이는 은보라도 지키고 은보라는 교극이와 함께 미래를 키워나가려 합니다.사랑으로 두 사람이 하나 되는 이 자리에 참석하셔서 축복해 주세요.



정말 우리는 다른 어떠한 조건이나 주변의 것을 보지 않았다.사랑하는 마음 하나를 믿었다.나는 친정에서 330km나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직장을 옮기는 것도 힘겨워하지 않았고 뱀이 똬리를 틀듯 꼬불꼬불한 양구로 가는 길도 무섭지 않았다.연애하기 전부터 누누이 뚫린다고 얘기하던 배후령 터널은 결혼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이용 가능해서 나는 정말 우리나라 국토정책사업 중에 배후령 터널 개통 계획이 실행 중인 게 맞느냐고 재차 묻곤 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관사에서 첫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가도 가도 논밭밖에 없고 내비게이션을 켜면 차 모양 하나만 동동 떠다녀서 주변 자리를 익히는데 한참이 걸리는 곳이었다.여기선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밖을 나갈 필요가 없었다.아무 것도 없으니까.그렇지만 저녁밥 차려놓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신랑의 미소 하나면 난 충분했다.주변에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떤가?어차피 우리 신랑 외에는 주변의 것들이 보이지 않을 때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다.친구도,아는 사람도,퇴근 후에 즐길 여가거리도 없는 여기에서 신랑만 보고,믿고 그렇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

그래도 우리에겐 행운이 따랐고 양구읍내 신축관사로 이사를 나올 수 있었으며 곧 아이도 생겼다.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니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현실들이 살갗에 부딪히기 시작했다.“군인과 결혼해서 힘들지 않아? ”라는 질문에 그 전까지만 해도 “에이,뭐 군인이라서 특별히 힘든 거 있나요?남들이랑 다 비슷하죠”라고 답해왔었다.나 혼자의 몸일 때는 자유로웠고 큰 어려움도 없었다.물론 임신은 안 했어도 함께하는 신랑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해도 당장 뛰쳐나가서 사올 곳도 없고 외출 및 외박 허용지역 이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저래 미안함이 넘쳐났을 것이다.거기에 임산부의 넘쳐나는 호르몬으로 인한 감정 변화까지 감당하라고 해댔으니 그도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물론 신랑이 가진 군인으로서의 모든 조건이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아이를 가진 열 달 동안 병원 정기 검진에 그가 함께 가 준 건 딱 두 번이었다.홀로 운전해서 병원 의자에 앉아 진료를 기다릴 때 남편과 함께 온 여자들은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이고 모든 걸 가진 여자처럼 보였을까?너무 부러웠다. 진료를 마치고 춘천까지 나왔으니 장이라도 봐야지 싶어서 들린 마트에서 카트 밀어주는 남편의 팔짱을 끼고 장 보는 여자들도 부럽긴 마찬가지다.카트에 든 장바구니를 차로 옮길 때 배는 한가득 나와서 어찌나 힘든지… .나나 되니까 들지,약한 여자 같으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언제 애가 나올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신랑이 언제나 내 곁을 지켜줄 수 없음을 알기에 애 낳기 한 달 전에는 친정에 갔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려고 그러는지 일주일짜리 야외 훈련이 종결되는 시점에 진통을 시작했다.덕분에 신랑은 밤새워 훈련하고 잠 한 숨을 못 잔 채 우리 곁으로 왔다.그 여파로 진통 중인 내 옆에서 졸아서 아직도 한 번씩 나에게 구박을 받는다.그 와중에 내가 증거 사진도 찍어놨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한다.그렇게 우리 세 가족이 되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고 신랑도 아빠는 처음 해보는 노릇이니 우린 여전히 허둥지둥,우왕좌왕,동분서주하며 천방지축인 아들과 함께 성장한다.아이는 ‘사랑’이지만 육아는 ‘전투’이니 자연스럽게 가족애에 전우애까지 늘어간다. 전쟁 같은 육아시간을 거치다 보니 21개월 된 우리 애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도 그 시점이 토요일 오후라면 양구엔 갈 만한 병원이 없다.거기에 신랑이 주말 근무여서 나에겐 같이 갈 동지도 차도 없었다.피투성이가 된 애 얼굴을 보고 어쩔 줄 몰라 눈물만 흘린 결과 제때 치료하지 못한 우리 애 입술 안쪽엔 볼록한 흉이 남았다.양구는 의료시설이 좋지 않은 편이라 애가 다쳐서 응급실에 데려가도 춘천으로 나가보라는 말만 하니 때를 놓치기 십상이다.

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진 만큼 모든 사람이 가진 행복의 양은 같다고 본다.단지 그 행복을 느끼느냐,느끼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개인이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다.사람들이 가진 물질이나 환경적인 것에 격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많이 가졌다고해서 더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행복의 양만큼 불행의 양도 동일하지 않을까?내가 가진 어려움이 있다면 반대급부로 그만큼 돌아오는 행운이나 행복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사실 군인인 남편과 가정을 이루어서 내가 힘든가? 불행한가? 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돈을 엄청 많이 벌어주는 사업가 남편이었다면 내 행복의 양이 컸을까?아니면 나와 24시간 함께 해주는 짝이었다면 내 행복의 양은 배가 되었을까?아니라고 본다.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는 그의 뒷모습이 멋있고 나 또한 그런 그에게서 자부심을 느낀다.그가 하는 일이 소수의 이익만을 위함이 아니고 대의를 이루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서 뿌듯하다.반면에 이렇게 더위,추위 가리지 않고 애쓰는 군인들의 노고를 일반인들은 미처 모른다는 점에서 속상하고 애가 탄다.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을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겠는가?그가 군인이어서 내가 서운할 때도,아쉬울 때도 있었고 눈물 지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조금씩 있었기에 좋은 시간과 기회가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그가 군인이기에 나는 제공되는 관사에서 아기자기한 살림을 꾸려나가고 군에서 지원해주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수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쉬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다.나도 행복하고 아이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의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다. 사랑하는 우리 신랑의 군화 안에 숨겨진 땀과 굳은살이 그의 힘듦을 대신 말해준다.우리 신랑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거 잘 안다. 모든 군인들의 고단함과 노력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가정의 행복과 사랑 안에서 우리 군인 아빠들이 편히 쉼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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