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문학박사

▲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문학박사

9월 문학여행은 화천 사창리 일대의 곡운구곡(谷雲九曲)을 읊은 한시와 함께 했다.1곡 방화계부터 걷기 시작했다.유난히 더웠던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계곡을 찾았고 곡운구곡에도 여기저기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상류에서 공사를 하는지 물빛은 탁하다.

김수증(金壽增,1624~1701)은 사창리로 들어오기 직전에 평강 현감에 임명되어 가던 중,곡운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게 된다.현종 11년인 1670년에 화천군 사내면 용담1리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몇 년 걸려 일곱 칸의 집을 짓고 1675년에 온 집안이 이사를 왔다. 계곡을 거닐다가 뛰어난 곳 아홉 곳을 선정한 후 곡운구곡이라 불렀다.

3곡인 신녀협에서 점심을 먹고 청은대에 올랐다.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며 노닐던 장소에 세운 정자다.김시습은 여기서 하염없이 바위와 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자신의 울분과 고독을 바위처럼 하얗게 탈색시키고 싶었을까?물처럼 맑게 자신을 정화시키고자 했을까?김수증은 이곳을 수은대라고 이름을 붙였다가,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청은대로 바꿨다.김수증의 조카인 김창집(金昌集)의 시는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신녀 자취 있는 3곡에 아득히 밤배 띄워보니,/텅 빈 누대를 소나무와 달만이 천 년을 지켜왔네./청한자(淸寒子; 김시습)의 아취 초연히 깨치자,/흰 돌에 솟구치는 여울도 너무나 아름답네.’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이 신녀협이다.무성한 나뭇가지 때문에 자세하게 보이진 않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하얀색의 바위다.물 건너의 바위는 용암이 흐르다 굳은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욱 기이하다.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이 지표로 드러날 때,암석을 누르던 압력이 제거되어 팽창하는 과정에서 암석에 수평방향의 결이 발달한 편상절리 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양쪽의 하얀 바위 사이를 흐르는 파란 물이 시원하게 보인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물에 시선을 빼앗겼다.신녀협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물과,아래에서 바위 사이로 세차게 흐르는 물이 기괴하여 형언하기 어렵다고 실토한다.그래서 ‘신녀회’라고 했다.정약용의 눈을 쫓아 바라보니 과연 그러하다.

바위를 자세하게 보기 위해 계곡으로 내려갔다.너럭바위는 비누처럼 매끈하다.여울소리는 점점 커진다.물가로 다가서니 커다란 바위가 굴러와 있다.고개를 드니 맞은편 산기슭에서 굴삭기가 작업을 하는 중이다.산은 이미 붉게 속살을 드러냈다.물어보니 신녀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는 중이라고 한다.소규모 수력 발전소를 만들려고 하자 아름다운 경관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반대를 하였고,결국에는 계획을 철회시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다리를 놓는 이유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그런데 다리를 신녀협의 정중앙에 설치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 같다.신녀협의 경관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다리 놓기 좋은 곳을 먼저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고,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최소한의 개발 원칙이란 말이 무색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팔경(八景)과 구곡(九曲)은 도로가 뚫리거나 각종 개발에 의해 원형이 훼손되었다.그나마 남아있는 곳 중의 하나가 곡운구곡이다.신녀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 여행객은 김시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아마도 높은 곳에서 느낀 짜릿함만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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