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욱현

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

우린 뭔가 굴절을 겪었다.우리 민족의 정신문화 원형이 이렇지 않았다.우린 먹고살 게 있고 없음을 떠나서 ‘멋’을 사랑하는 민족이었다.고분에서 출토된 왕관과 그릇들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을 보라.그냥 그릇이면 될 것을 그릇표면에 누가 그렇게 그렸겠는가.일제강점기라는 원치 않던 36년 동안 우리의 어떤 문화들이 변형되고 단절돼서 그렇지,가까운 조선 시대만 해도 집집마다 무슨 당(堂)이라 하여 택호도 짓고 정자에도 각각의 이름을 지어주었다.정자 1호,2호가 아니었다.수고롭긴 하지만 편의보다는 마음을 꼭 실었다.우린 참 쉽지 않았고 까다로운 ‘문화’를 지켜왔다.

구한말시절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복식문화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부분이 있었으니,양반은 물론이요 평민들도 흰옷을 즐겨 입는데,빨래도 하기 어려운 흰옷을 다리고 풀까지 먹여 입고 다니더란 것이다.일본인들은 그걸 막기 위해 검은 옷을 장려하고 흰옷 입으면 고궁에도 못 들어오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흰옷이라 자주 빨아야 하고 심지어 다리고 풀까지 먹이는 모든 절차가 그들에겐 괜한 노동력 낭비로만 비쳐졌다.하지만 우리 민족은 그러나 마나 잿물에 삶아 빤 ‘흰 옷’을 입었다.그걸 체면치레라고 폄하하지 말자.가난한 이에겐 아무리 힘들다 해서 누추함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자존이요,부자들에겐 당연히 격을 갖춤이었다.그것 또한 우리의 복식문화이자 정신문화이다.

한류가 세계 곳곳에 넘실대고 있다.우린 정말 노는 것 또한 대충 ‘놀지’않는다.아프리카 타악도 우리 꽹과리 장구 타악을 보면 혀를 내두른다.정박으로만 두드리는 게 아닌 엇박에 애드리브까지 더해 현란하기 짝이 없다.우리 민족은 문화민족이고 그 차별성으로 세계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현재 정부 전체 예산에서 문화예술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1%대이다.(관광까지 포함했음에도) 2000년에 처음으로 1%를 달성했지만 아직까지 1.5% 목표 달성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문화민족인데 문화에 투자하는 건 아직 국민적 합의가 더 필요한 듯 보인다.

최근 공연을 위해 평창 이효석문화제를 다녀왔다.올해 축제에도 메밀꽃 하나 보자고 10일간 50만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단순히 메밀꽃이겠는가.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이 있어서이다.축제야 18회이지만 효석백일장은 벌써 37회를 맞았다.그 역사를 지킨 봉평 사람의 이야기인즉,봉평 같은 촌에서 뭐 먹고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우리 고장이 고향인 이효석이 있지 않은가 해서 백일장도 열고 마을 사람들 손으로 직접 축제를 꾸린 게 그 시작이었다고 들었다.살림살이와 문화가 그렇게 긴밀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해보자 하면 쉽지 않아서 봉평의 성과는 더 놀랍다.문화를 통한 지역사회 발전을 논하면 ‘먹고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맨 먼저 막아서기도 한다.예전 어느 아버지는 가난한 담벼락에 그림 하나를 그려놓으셨다.그런데 요즘의 아버지는 거기에 광고판 만들어서 돈 벌자고 해야 사랑받을 거 같다.그림은 없고 생존만 있다.새하얀 메밀꽃밭에서 ‘우리 민족은 문화민족이다’ 라는 말을 자꾸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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