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강하

강원대 교수

‘칼부림’이라는 섬뜩한 언어가 ‘청소년’이라는 파릇한 단어와 결합되는 현실을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얼마 전 원주의 한 중학교에서 일어난 학생 간 칼부림 사건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학교에서 친구에게 칼을 휘두른 가해 학생은,가해자가 되기 직전까지 피해자였다.가해 학생은 피해 학생에게 불려 다니며 공원과 학교에서 뺨을 맞고 모욕적인 언사에 시달리다가 신고까지 했지만,폭력이 계속되자 참지 못하고 학교에서 칼을 휘둘렀다.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어쩌면 가해학생은 오늘도 폭력과 모멸적인 욕설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가해 학생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이 폭력적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찰나의 순간에 뒤바뀌었다는 사실을,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이토록 모호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도내의 뉴스와 신문 기사를 검색해보면,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자녀가 학교폭력으로 징계를 받은 사실에 격분해 학교에서 흉기를 휘두른 학부모,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교사,고등학교 기숙사에서 후배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선배,자신을 괴롭혔던 친구에게 칼을 휘둘렀던 중학생.‘세상에 이런 일이!’하며 입을 떡 벌어지게 할 만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그 소식들을 기사로 접하는 건 오래 반복되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지역 사회를 들끓게 하기에 관계 기관은 대책을 내놓기 위해 고심한다.학교에서는 사고를 덮기에 급급하고,관련자들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며 사람들은 하루빨리 가해자를 가려내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우고 싶어 한다.그런데 이 사건이 학교에서 벌어졌다고 해서 일선 학교와 교육계에 큰 소리를 치며,대책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타당한 일일까?물론 그게 학교와 교육청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는 하겠지만,원주 학교폭력 사건은 순수하게 학교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폭력은 학교,공원,온라인상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담당 교사와 부모에게 따지듯 묻고,책임을 전가하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잘 가르치고 잘 키우는 건 오롯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아이들을 돌보는 건 개인의 책임에 앞서 공동체의 의무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오른다.혹자는 아이에게만 유난을 떠는 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대륙을 건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이 속담은 우리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알려준다.아이 하나를 키우는 게 이렇게 요란을 떨 일이냐고 묻는다면,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아이는 어른들의 거울이다.병리적이고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곧고 바르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 아닌가?가해자가 된 청소년 앞에서 해야 하는 건,손가락질과 비난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기성세대의 반성이어야 한다.아이들은 듣고 배우기에 앞서,보고 배운다.온갖 비방과 폭력,속임수와 편 가르기가 난무하는 세상을 보는 아이들에게,바르고 정직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가식이고 위선이다.

가해자와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절차와 징계를 논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은 당사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다.가해자와 부모,담임교사는 누구보다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사람들의 시선과 신상 털기,모욕적인 댓글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내가,내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은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를 양산할 뿐이다.이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 뒤,두려움과 슬픔,분노와 후회,고통을 겪고 있을 당사자,그리고 모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많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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