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열

영동본사 취재국장

‘명태’ 사진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항·포구에 산더미 처럼 쌓인 명태가 아니라 2∼3마리 명태가 수족관을 노니는,어찌보면 생경스러운 모습의 사진이다.그런 사진이 전국지와 지역의 여러신문 1면에 앞다퉈 실리고 대부분 신문이 ‘명태’라는 생선을 소재로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했다.해양수산부는 그날 세계최초로 명태 완전양식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동해상에서 사라진 ‘국민 생선’ 명태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언론이 경쟁적으로 대접을 해 준 것이다.

혹자는 “생선 하나에 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그러나 수산업사(史)를 돌이켜보면 명태는 생선,그 이상이다.대접해 줄 충분한 이유가 있다.이름만 봐도‘북어’ ‘동태’ ‘노가리’에서부터 ‘황태(겨울철에 얼고 녹기를 반복해 말린 명태)’ ‘지방태(앞바다에서 잡은 명태)’ ‘막물태(끝물에 잡은 명태)’ ‘백태(기온차가 커서 하얗게 마른 명태)’ 등등에 이르기까지 줄잡아 수십가지 이름을 가진 생선이 명태다.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없어서는 안될,활용 가치가 높은 존재라는 얘기다.

역사를 살펴보면 명태가 우리네 백성들의 식생활과 얼마나 밀접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을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다.명태는 임하필기(林下筆記)의 기록 그대로 ‘함경도 명천의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처음 잡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명태가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이다.실학자 서유구(1764∼1845년)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명태를 겨우내 말린 것이 동해안 원산에 집하됐다가 배나 말에 실려 각지로 운반되는데 밤낮으로 인마(人馬)의 황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또 이규경(1788∼1856년)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명태를 말린 건제품이 전국에 유통되는데 매일의 반찬으로 삼고 여염(일반백성)뿐 아니라 유가(儒家)에서도 이를 제사에 쓴다”고 밝혔다.

명태를 필두로 바다 수산물은 가난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영양 공급원이었다.쇠고기나 돼지고기 등 육(肉)고기를 맛보는 것은 거의 연례행사나 다름없던 시절,백성들은 수산물에서 동물성 영양소를 공급받았다.김장 김치에도 명태가 들어가고 명태 밥식해,서거리,명란,창난젓,매운탕,맑은 탕,북엇국 등의 다양한 음식이 서민 식생활의 풍미를 더했다.내장에 아가미,대가리,껍대기까지 버릴게 없는 생선인 명태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던 고단한 백성들에게는 가장 고마운 식재료였다.삼시세끼 밥상에 오르고 혼례상·제사상에 까지 먹거리가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둥그런 눈에 어찌보면 촌순둥이 같은 명태가 떡 하니 자리잡았다.그렇게 고마운 생선,명태를 위해 사람들은 시를 쓰고 노래까지 바쳤다.

한해에 최대 수십만t이 잡히던 명태가 2000년대 들어 어느순간 사라져 동해안 어촌경제가 위축되는 등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명태를 되살리는 완전 양식 기술이 개발됐다고 한다.식생활·문화가 풍족해지는 것은 물론 위판에서부터 할복,건조,2차 가공에 이르기까지 일자리 창출 등의 다양한 효과가 기대된다.더구나 요즘은 이른바 ‘먹방’ ‘쿡방’이 안방극장의 대세가 된 식도락 관광의 시대가 아닌가.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하니 어느덧 생태국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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