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22일 오전 11시 국립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현충원 안쪽 나즈막한 산기슭을 언덕 삼은 최규하 대통령 묘역은 높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묘역을 둘러싼 산자락에 붉은 빛이 은은한 소나무들은 늘푸른 기상을 내뿜고 있었다.88년 한평생을 청렴과 검박의 공직자로 살다간 고인이 영면하기에 좋아 보였다.서거 10주기를 맞아 추도식을 앞둔 고인의 묘역 앞 상석에는 영정이 모셔져 당신을 기리며 불원천리 찾아온 추모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고향 원주와 서울에서 아침 일찍 달려온 유가족과 친지들이 하나 둘 도착하자 군악대의 추모곡이 묘역에 조용히 울려 퍼져 나갔다.

얼마후 최규하 대통령기념사업회 함종한 이사장은 “각하! 요즘 나라가 어수선한 것 같이 느껴지시죠?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라며 추도사를 시작했다.추모의 말은 역사를 회고했다.“여기에는 전두환 대통령께서도 와 계십니다.제가 생전에 그렇게 여쭈었죠.‘대통령님! 사람들이 대통령님을 바보라고 합니다.왜 그렇게 쉽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셨냐’고요.그러면 이렇게 답하셨죠.‘함군! 대통령 자리라는 것은 그렇게 엄중한 자리는,누가 달라고 주고 누가 내놓으라고 내놓는 자리가 아니다’고 말씀하셨죠.그리고는 ‘6.25만큼이나 엄청나게 어려웠던,경제적으로 국가 안보상으로 엄중한 그 시기에 3김씨와 전 장군을 모두 만나보고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이 시대를 이겨 뚫고 나갈 사람으로 전 장군을 생각했다’고 하셨죠.제가 ‘왜요?’라고 다시 여쭙자.또 이렇게 답하셨죠.‘결기와 용기,그리고 순발력과 결단에 슬기도 있어 보여 내가 당신에게 하라고 그랬지,당신이 내게 내놓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죠”라고 증언했다.

이 순간 85세를 넘긴 전 전 대통령은 눈을 지그시 감고 추도사를 들으며 36년 전을 회고하듯 상념에 잠겨 있었다.옆에 자리 한 77세의 이순자 여사는 반듯한 자세로 추도식 내내 의자에 등을 대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지켰다.전 전 대통령은 추도사를 마친 함 이사장의 목례에 간단히 목례로 화답했다.또 유족 대표에 이어 부인과 나란히 묘역으로 나가 영정 앞에 헌화,분향했고 이 여사도 헌화,분향한뒤 모두 고인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묵념을 했다.최 대통령 묘역 앞에 자리 한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와 함께 ‘제12대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가 보낸 조화가 한동안 고인의 영정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30여 분간 진행된 추도식후 차량으로 이동해 식장을 빠져 나가는 순간까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모처럼 10주기를 맞아 잠시 활기가 넘쳤던 최규하 대통령 묘역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가끔 산책을 하거나 등산을 하던 시민들이 조화를 발견하고 오늘이 8개월 동안 대통령으로 살다간 고인의 10주기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옷깃을 여미곤했다.그리고 대통령,국무총리,외무부 장관 등으로 고인을 모셨던 비서관들이 손수 만들어 세운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현석(玄石) 최규하 박사 추모비’를 읽으며 1980년 격동기를 홀로 감내했던 최규하를 회고했다.‘대통령께서는 한평생을 국가보위와 경제발전에 헌신 봉사하고 선공후사와 근검절약을 온 몸으로 실천하여 모두에게 귀감이 되셨습니다.돌연한 국가 변란으로 나라가 어려울때 국가 원수로서 사명의 짐을 지고 최고의 정치는 국가안보라는 신념으로 국권수호에 진력하며 세속의 세찬 바람에는 태산같이 의연함을 보이셨습니다.외교의 거목으로 한일수교,한미안보강화,중동자원외교,남북교류 등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확인 행정을 통해 국민과의 약속은 천금같이 여기는 공직자의 자세를 선도하셨습니다.40여 년간 불편부당한 공직생활 중에 하루도 결근하지 않은 근면성과 책임감 그리고 청렴결백의 미덕은 국민의 표상이었습니다.대통령께서는 고매한 인품에 기개있는 선비요 큰 어르신이셨습니다.2007년 1월29일 비서관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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