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범선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보컬 및 기타

‘Video et taceo.’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잉글랜드의 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1533-1603)의 좌우명이었다.대한민국의 대통령 박근혜의 행태이기도하다.지난 대선TV 토론에서 박근혜는 엘리자베스1세를 자신의 역할모델로 꼽았다.나는 경악했다.이 사람은 정녕 민주공화국 대통령선거에 나와서 전제군주를 본받겠다한건가? 엘리자베스 2세도 아니고 1세를? 왜냐고 묻자 그는 “자기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늘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2004년 한나라당 대표 취임 때도 그는 같은 질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했다.음모도 있었지만 잘참아내 사려깊은 지도자가 됐다”고 답했다.

박근혜가 엘리자베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떠한 사상이나 정책때문이 아니다.삶에 공감하기 때문이다.공주로서 비슷한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어려서 고생을 많이’했지만 ‘잘 참아내’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은 실제로 닮은 구석이 많다.1.엘리자베스도 어머니를 비극적으로 잃었다.아버지 헨리 8세의 둘째부인이었던 앤볼린(Anne Boleyn)은 남편이 원하는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내란과 간통죄로 참수당했다.문세광의 총탄에 죽은 육영수 역시 우연이지만 박정희의 둘째부인이었다.2.박근혜는 2006년 지충호에게 커터칼로 피습당했다.엘리자베스도 죽을 고비를 여럿 넘겼다.1571년에는 리돌피(Ridolfi)라는 은행가가,1586년에는 배빙턴(Babington)이라는 귀족이 암살을 기도했다.3.‘처녀왕’ 엘리자베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후대를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고 잘라 말했다.박근혜 또한 “내게 자식이 있기를 하냐”며 “국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4.엘리자베스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적당히 섞은 ‘성공회’라는 신생종교에 몸담았고 1559년 잉글랜드 성공회 최고취리자로 추대됐다.박근혜는 기독교와 불교를 적당히 섞은 ‘영생교’라는 신생종교에 빠졌고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되었다.5.엘리자베스의 오랜 친구인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는 평생 왕의 총애를 받으며 비선실세로 군림했다.그 신임은 더들리의 조카인 존디(John Dee)에게까지 이어졌다.점성술사였던 디는 엘리자베스의 대관식 날짜를 정해주는 등 여러 신비로운 조언을 해주었다.박근혜의 오랜 친구인 최순실도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비선실세로 군림했다.영생교 교주 최태민에 대한 박근혜의 신앙이 그의 딸인 최순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최순실은 박근혜의 취임식에 오방낭을 장식하는 등 여러 신비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박근혜는 분명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하겠다고 했고,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했다.그가 제왕적 통치방식을 택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국민이 있나? ‘Video et taceo.’직역하면 “나는 보고 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이러한 우유부단(優柔不斷)이 바로 제왕적 통치의 핵심이다.어물어물하고 있으면 신하들이 알아서 왕의 의중을 헤아리고 해법을 제시한다.그 해법이 통하면 왕의 덕이요,안통하면 신하의 탓이리라.

청와대는 이 와중에도 꼬리자르기에 여념이 없다.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구국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결단은 우리의 몫이다.박근혜 대통령이 엘리자베스1세처럼 군다고 우리도 그의 신민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보고만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인가.진실을 알고도 말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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