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광 복 논설위원 hamlit@kado.net

 2002년 12월 14일, 남북한군이 함께 DMZ를 무장해제 시켰다. 옛 동해선 철도 자국을 따라 지뢰가 제거됐다. DMZ 속에 폭 100m의 '금강산 회랑'이 생겼다. 2003년 1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군사실무회담 남측 수석대표 문성묵 대령과 북남 군사실무회담 북측 수석대표 류영철 대좌가 '임시도로 통행 군사보장 잠정 합의서'에 서명했다. 군사분계선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탈 많던 그 문제는 그렇게 해결됐다. 그리고 2003년 2월 5일, 86명의 남쪽 사람이 '답사단' 표찰을 달고 그 회랑을 따라 북으로 갔다. 다시 2003년 2월 14일, 412명이나 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시범관광'이라며 그 길을 따라 갔다. 어느새 남쪽 사람 500 명이 DMZ를 건너갔다. 이러다 1천 명, 1만 명, 10만 명이 갈지 모른다. 아니, 가기로 돼 있다. 속초 아바이 마을 식당주인은 오리지널 명태순대를 구하러 원산 장을 다녀올지도 모른다. 언제 될지 모르지만 하여튼 될 듯 안 될 듯 꼬이다가도 결국 DMZ가 뚫린 것을 보면, 한국 땅에서 전쟁만 안 터지면 그건 보증수표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동독이 서독과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국경을 개방했다. 독일통일사회당의 동베를린 책임자 귄터 샤보브스키는 그날 동독 TV에 나와 있었다. "각료회의에서 인민들에게 조건 없이 서베를린과 서독 그리고 외국을 여행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말하는 그는 약간 떨고 있었다. 동베를린 주민들이 국경 검문소로 쏟아져 나왔다. 서독주민들은 두 줄로 늘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잠시 후 브란덴부르크문 앞 장벽이 망치와 도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 신문이 모두 그 사진을 실었다. 독일과 같은 신세인 한국에서는 '20세기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는 캡션이 달린 그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미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이 무너질 때 베를린 장벽 붕괴는 예고 됐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E45번 국제도로, 그 국경검문소의 바리케이드가 치워질 때 사람들은 동·서독 통일은 시간문제라며 고개를 끄떡이었다.
 부산에서 두만강 끄트머리 은성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는 강원도 고성 명호리 남방한계선 철책선에서 막혀있었다. 그 철책선 8번 통문이 쫙 열리자 버스들은 출렁출렁 춤을 추며 DMZ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었다. 맞다. 1998년 10월 29일 고(故)정주영 명예회장의 소 떼 몰이 트럭행렬도 그랬었다.
 나는 그때 늦은 점심을 먹으며 식당 벽에 달린 TV를 보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드라마 재방송 성화에 주인은 채널을 돌려버렸다.
 "이적행위야! 돈 먹이고 가는 거야. 모두 잡아 처넣어야 해!"
 때맞춰 낮술에 익은 얼굴로 몇 몇 60대가 버럭 소릴 지르며 휑 나가버렸다. 그들은 조금 전 DJ의 북한송금 사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런 감정표현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날 한국인들의 감정은 너무 밋밋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고사하고, 중앙아시아 어느 국경이 개방되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새 우린 감정을 다 소진했는지 모른다. 월드컵 4강 신화에 쏟아 부었고, 대선 드라마에, 지방분권에, 동계올림픽 유치에 너무 탄성을 질러 웬만한 일은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촛불시위에, 반미에, 반전에, 북한송금에 모든 감정을 털어놓았고, 북핵에, 전쟁위협에도 놀랄 만큼 놀라 모두 정말 철판 깐 심장이 된 것일까. 우린 이 세기적 극적 순간을 가슴딱지 하나 붙이지 못하고 보내버리고 말았다.
 동서냉전의 마지막 국경도로는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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