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원

소설가

오래 전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회사에서 사외보를 만드는 일을 잠시 했다.그때 새해가 되어 신년호 사보 표지에 동해바다의 일출 사진을 실었다.그런데 회사 윗분이 자꾸 일출사진을 트집 잡았다.자기가 보기엔 왠지 일출 사진 같지 않고 일몰 사진 같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살아온 날들 경험 속에 있었다.그 분은 서해바다 쪽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바다 위로 지는 해만 보았지,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그래서 바다 위로 붉게 떠오르는 해도 그걸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그 분 눈엔 왠지 일출 풍경이 아니라 일몰 풍경으로 보였던 것이다.

일출 일몰 사진이 그렇듯 겨울철 눈에 대한 풍경도 자신의 경험 안에 이미지를 구축한다.내 고향은 눈의 고장 대관령 아래의 산촌이다.어릴 때부터 겨울이면 우리 키 높이만큼 내리는 눈을 매년 연례행사처럼 보고 자랐다.눈이 많이 내릴 때면,마당의 눈이 툇마루를 넘을 때도 있고,때로는 지붕이 낮은 초가집의 처마에 닿을 때도 있었다.그러다 보니 발목 높이 정도의 눈은 눈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 오니 그 정도의 눈을 다들 ‘폭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자동차도 엉금엉금 기고,사람들도 엉금엉금 기고,온통 도시 전체의 기능이 눈에 마비되고 마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눈 하면 나는 어김없이 내 고향 대관령의 겨울 길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아마 우리나라에,또 세계적으로도 이보다 더 시적인 교통표지판도 없을 것이다.내 소설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 번 쓴 적이 있는데,이미 만산에 단풍이 지고 땅 위에 낙엽이 흩날리는,그래서 곳곳에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평창에서 대관령 쪽으로 달리다보면 그 길 중간중간 ‘첫눈 조심’이란 교통표지판이 임시로 서 있었다.

‘첫눈 조심’이라니.길 위에서 이런 교통표지판을 본다면 다들 어떤 마음일까.정말 도로 위의 경고 표지판치고는 너무도 시적이지 않은가?대체 그 뜻은 또 무엇인지?처음엔 나도 그 말이 궁금했다.그냥 ‘눈길 조심’하면 될 걸 왜 하필이면 첫눈을 강조하여 조심하라는 것인지.첫눈만 조심하고,그 다음 눈은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분명 아닐 것이다.

뒤늦게야 나는 그것을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했다.길 위에서 만나는 눈은 누구에게나 모두 첫눈인 것이다.늦가을이나 초겨울,아직 눈도 없는 길 위에 ‘눈길 조심’ 이렇게 써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언제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울지 모르니 과속하지 말고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늘 마주치면서도 마치 그것이 처음인 것처럼,또 이렇게 첫눈처럼 조심해야 할 일들은 얼마나 많은지.이렇게 길의 풍경 하나에도 우리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것들을 만나게 된다.그래서 여행이 우리 삶을 더 여유롭게 하고 정신적으로 풍족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올해는 초가을부터 지금까지 서울에서 강릉까지 참 많이도 오갔는데 이 임시 도로 경고판을 보지 못했다.2018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막바지 점검처럼 도로 보수만 열심히 하고 있다.아마 이제는 설치하지 않는 모양인데,그래도 언제나 겨울 나들이에서는 절대 과속하지 말고 언제 어느 때 내리거나 얼어붙어 있을지 모를 모든 길의 첫눈을 조심하시길.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