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전범선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보컬 및 기타

▲ 전범선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보컬 및 기타

요즘 취업이 힘들다.인문학 전공자들이 특히 죽어난다.인문학이 국가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대학은 앞다투어 인문학과를 통폐합하고 있다.

인문학은 사람을 삐뚤어지게 만든다.나는 역사학 석사까지 따고서 지금 록밴드를 하고 있다.내 주변에는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문학도들이 (나를 포함해서) 수두룩하다.속된 말로 ‘노답’이다.

인문학은 원래 답이 없다.사회과학이랑 다르다.한국에서는 둘을 통칭하여 문과라고 하지만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답이 있다.과학이란,현상을 분석하여 법칙을 밝히고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다.따라서 사회과학이 성립하려면 인간도 우주 만물과 같이 예측가능한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유전자와 성장 환경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기계와 같으니까.하지만 인간은 몹시 복잡다단한 기계다.개인 간의 차이도 상당하다.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은 불가피하게 인간에 대한 가정을 한다.경제학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상정하고 국제관계학자는 국가를 당구공에 비유한다.단순화하고 획일화하여 일반화한다.그래야만 법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뻔하다.경제학자의 예측은 일기예보보다 부정확하다.정치학자 중 몇 명이나 트럼프의 당선을 예상했나? 사회과학의 진보와 상관없이 인류 사회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예나 지금이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인문학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겸허히 받아들인다.예언을 꺼린다.그저 과거 인간의 삶이 얼마나 다양했고,어떤 과정으로 변해왔는지 이야기할 뿐이다.가변성과 특수성과 다양성이 인문학의 본질이다.만약 여태껏 지구상에 살았던 천억명이 넘는 인간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을 했다면,사회과학은 자연과학 수준의 신뢰성을 얻을 테지만 인문학은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남들과 달랐고 플라톤은 그의 스승과 달랐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과 또 달랐기 때문에 서양 철학이 생겨났다.같은 스페인 내전을 겪고도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썼고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다.내가 어려서 읽은 <어린 왕자>와 커서 읽은 <어린 왕자>의 의미는 천지차이다.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것이 아니다.오웰과 헤밍웨이가 다른 것이다.그래서 아름다운 것이고.나는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18세기 혁명가 토마스 페인의 글을 모두 읽었다.일년 가까이 매일 그와 대화했고 그의 유언을 읽으며 눈물 흘리기도 했다.그러나 나는 아직도 페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 않던가.당장 내 마음도 어느 콩밭에 가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백년 전 죽은 사람의 마음을 어찌 알겠나.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러나 그 답 없는 인문학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다름을 쫓는 학문이 있어야 삶의 선택지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나는 한국 사회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답 나오는’ 사람보다는 ‘노답’인 사람,예측불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이사야 벌린은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인간이라는 삐뚤어진 나무에서 꼿꼿한 것이 만들어진 적은 없다.’인문학은 사람을 삐뚤어지게 만든다.삐뚤어진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꼿꼿한 것을 만들려면 모난 곳을 깎아내야 한다.나는 그게 싫다.자유롭고 싶다.삐뚤어질테다.나를 위한 변명이자 인문학을 위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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