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욱현

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한 (현재의 왕) 숙부와 숙부의 품에 안긴 (왕비) 어머니 앞에서 그들의 범죄 사실을 풍자한 연극을 한다.그리고 그들의 낯빛을 살핀다.그렇게 심증을 굳히고 싶었던 것이다.물론 극 중에 숙부와 왕비는 매우 당황하고 햄릿은 복수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요즘 인터넷에선 ‘동공지진’이란 표현을 쓴다.양심에 찔리는 질문을 받았을 때 동공이 숨길 수 없이 흔들림을 조소하는 신조어이다.성탄절이 다가온다.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그 유명한 챨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공연될 것이다.인색한 스크루지 영감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밤,세 번의 꿈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게 된다.특히 미래는 자신의 묘 앞에서 사람들이 지독한 독설을 해대는 걸 보고 (역시 동공지진이 일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살아 온 모습을 깨우치고 자신을 바꾸게 된다.단 하룻밤 꿈에 말이다.역시 드라마다.‘크리스마스 캐럴’은 챨스 디킨스가 1843년 발표한,불과 작가가 30대 초입에 쓴 소설이다.노인의 지혜를 담은 듯한 이 작품은 사실 젊은이가 쓴 것이다.그래서 한편으론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아마 세상을 더 알았더라면 결코 인간이 하룻밤에 그렇게 바뀔 리가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햄릿도 스크루지 영감도 ‘자신이 객관화 되는’ 경험을 통해 양심이 자각을 일으킴을 보여준다.양심은 자각의 근원이다.하지만 현실 속에선 어떨까.범법자들은 혐의사실을 코 앞에 들이대도 ‘모른다’,‘기억이 안난다’로 일관한다.도리어 너무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떳떳함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한다.양심을 뛰어넘는 생존에 대한 집착이다.또 한 작품이 생각난다.미국의 저명한 극작가 아서밀러의 ‘시련The Crucible’은 국내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인기작이다.1600년대 말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마녀사냥을 소재로 만든 이 작품에서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사 존 프록터는 마녀사냥의 핵심인물인 소녀 아비게일과 과거에 내연관계가 있었다.아내 외 마을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극의 종반부에서 존 프록터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 자백을 하면 아내도 살리고 자신도 살릴 수 있었다.하지만 마을사람들 일부가 마녀로 지목되어 죽게 되었다.결국 선택의 기로에 선 존 프록터는 하녀 아비게일이 자신과 내연관계가 있었고 그 때문에 아내의 미움을 사 집에서 쫓겨났으며 그 원한에 이 모든 마녀사냥의 소동을 제공하는 것이란 사실을 밝힌다.존 프록터는 진실을 밝히고 마을사람들을 살리지만 자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악마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걸 보았다는 거짓 증언에 서명할 순 없다며 내 뱉는 대사가 바로 ‘그건 내 이름이니까요! 내 평생에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오.이름도 없이 나보고 어떻게 살란 말씀이오?’이다.거짓을 말할 순 있지만 서명할 순 없다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강력한 애착이었고 그것은 곧 영혼의 고결함을 지키려 했던 것이었다.청문회와 국정조사에 나온 증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침없는 말들,그들의 눈은 평온하다.그럼 그간 드러난 모든 혐의점은 무엇이고 분노했던 우리는 무엇일까? 그들의 영혼은 그렇게 고결한가? 고결함 대신 생존을 택한 건 아닌가? 얼마 후면 모든 법적 결론이 공표될 것이다.그 결론에 따라 누군가의 눈동자에는 결국 지진이 날 것이다.아니면 요즘 갑자기 한반도를 자주 찾아오는 지진이 또 찾아올지 모른다.땅을 치고 발을 굴리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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