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 스님 오대산 월정사 부주지
새평창포럼(사) 상임대표

▲ 원행 스님 오대산 월정사 부주지

지난 12월 21일은 동짓날이었습니다.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예로부터 그날엔 동지 팥죽도 쑤어먹지요.오대산 월정사 산방(山房)의 밥상에도 팥죽이 올라왔습니다.하지만 맛이 영 달지 않았습니다.최근의 시국이 꼭 동짓날 같아서였습니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그래서 가장 어둡고 암울한 날.우리 국민이 겪고 있는 최근 몇 년을 동짓날과 같은 암흑의 시절로 표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아마도 저잣거리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물어보면 오히려 약하다고 야단을 맞을 겁니다.산중에 있다 보니 세상물정 모른다고 말이지요.

최근 두어 달에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치욕에 가까운 국정농단 사태는 동지팥죽의 맛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어떤 이는 팥죽 안에 들어있는 찹쌀 단자가 최순실로 보였다고 하니 말 다 했지요. 그런데 이런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게 있으니 바로 청문회장의 국정농단 주역들의 태도입니다.모른다,기억이 안 난다,전화 한 통 한 적 없다는 말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습니다.평생 배운 법 지식을 악용해 이리저리 교묘하게 법망을 회피하는 ‘법꾸라지’까지 생겼습니다.

이 희대의 국정농단 앞에서 국민은 증인들의 반성과 참회를 바라고 있습니다.최소한 “잘못했다”는 그 짧은 한 마디라도 듣고 싶어 합니다.그러나 그들은 알량한 잔꾀로 모든 걸 회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박근혜 대통령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노자의 천도론(天道論)에 보면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하늘의 그물은 비록 촘촘하지는 못하나 결코 놓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즉,민생을 배반하고 정의에 역행하면 설혹 실정법이 ‘거미줄 법’이어서 일시적으로는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최종적으로 하늘의 그물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형체라면 역사는 정신입니다.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역사는 거울이고 그물입니다.그들은 노자의 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지금은 얕은꾀로 눈앞의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지만 역사의 심판과 하늘의 그물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음을 말이지요.

한국불교의 대 선지식이자 오대산 월정사 조실이셨던 탄허(呑虛)스님은 정치지도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 ‘국민을 위한 철학’을 꼽았습니다.역사의 심판과 하늘의 그물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 철학을 갖추는 첫 걸음이 아닐까 합니다. 동짓날이 지나면 서서히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집니다.그래서 중국 주나라에서는 동지를 설로 삼으면서 생명과 광명이 부활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그러니,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병신년을 보내고 정유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기운이 벌써 샘솟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이 진행 중이고,광장에서는 여전히 촛불이 꺼지지 않고,거기에 더해 조류독감의 창궐로 2500여만 마리가 넘는 닭오리가 살 처분되는 등 올해 남은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그러나 정유년 새해에는 밝은 기운이 한반도에 비춰서 어두운 모든 것들이 소멸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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