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숙

전 춘천여성민우회 공동대표

전도유망한 신경외과 레지던트 폴.의사로서 탁월한 능력 뿐 아니라 좋은 의사가 지녀야 할 덕목도 갖췄다.혹독한 수련과정이 끝나갈 즈음 체중이 급격히 줄고 심각한 요통이 찾아온다.종양이 덮고 있는 폐와 이미 주변으로 전이된 자신의 CT 사진을 확인한다.그로부터 2년 남짓한 동안 폴은 의사와 환자의 자리를 오가며 암과 투병하지만 결국 자신의 회고록인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앞둔 폴이 자신의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고,자신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생명을 낳기로 결정하는 선택들이 감동적이지만 나는 폴이 의사로서 보여준 도덕적 반성과 환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인상적이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폴은 자신의 지난 삶을 시기마다 검토하고 반성한다.해부실에서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는 자신들을 깨닫고 반성한다거나,스스로가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그가 찾고자 한 삶의 의미였다.의사는 기술적인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환자와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거나,신경외과 수술에서 의사는 환자의 정체성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면 지키려 애써야 한다거나,나아가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뿐이라는 다짐처럼,환자를 대하는 그의 숭고한 태도는 다른 무엇보다 감동적이다.

지난해 12월에 읽은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젊은 의사의 마지막 기록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고,한 해를 마감하며 되뇌는 삶의 무게감 때문에도 그랬다.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목도하는 죽음들이 던지는 물음도 간과할 수 없었다.

새해에도 여전히 수많은 닭과 오리들이 포대자루에 담겨 구덩이에 묻히는 뉴스를 본다.

농장 주인들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다고 호소한다.도시 밖에서 가축들의 비명을 들으며 죽음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주가가 오르고 보상금을 챙기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기업들이다.

양계 분야에서 닭을 제공하는 기업이 갑이라면,기업에 소속된 양계 농가는 을이라 한다.닭고기 공급 과잉으로 가격 폭락을 염려하던 기업들로선 조류독감이 수요와 공급에 균형을 맞춰줄 호재였고,이들 기업의 주가는 12월 들어 상승했다.

그런 와중에 가축들은 갑도 을도 아닌 관계에서 구덩이에 매몰되었다.인간의 필요 때문에 길러진 가축이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다층의 관계가 존재한다.애정을 주고받는 관계,돌봄과 보살핌의 관계,생명과 죽음의 관계들이 이어진다.그들 주변으로도 수많은 인간관계가 연결된다.생매장 할 수밖에 없는 정부의 허술한 대책과 이익에 눈이 먼 기업들의 소홀한 방역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계는 단절되고 파괴되며,그 피해조차 온전히 떠안게 된다.어쩌면 가장 큰 피해는 오래도록 살처분 현장을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일지 모른다.

▶약력△강릉여고·한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전 춘천여성민우회 공동 대표 △카페 느린시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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