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대신 센터로… 남들 만큼 즐겁지 않은 방학
엄마와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
집과 센터 반복… 마음 문 닫아
점심시간 만큼은 9살 개구쟁이
새해 소원 “받아쓰기 90점 받기”

▲ 엄마와 단둘이 살고있는 9살 승민(가명)이가 춘천의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레고를 조립하고 있다. 사효진

도내 아동센터 4400여명 보호

정부 지자체 지원금·후원 운영

폭넓은 프로그램 제공 역부족

 

지난 9일 춘천 벧엘지역아동센터.이날도 승민이(9·가명)는 30분 지각했다.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승민이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다.매일 10시30분까지는 센터에 나와야 한다고 엄마에게도,승민이에게도 알리고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오전에는 국어와 수학 수업이 있는 날.수업시간임에도 왁자지껄한 친구들과 달리 승민이는 유독 조용하다.오랫동안 주변의 꼼꼼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승민이는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는 데 소극적이다.승민이가 센터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몰라요”와 “싫어요”다.정말 모르고 싫어서가 아니라 승민이는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고 얘기하는 커뮤니케이션에 인색하다.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이름을 물으면 긴장하고 날부터 잔뜩 세운다.부끄러워서 회피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이주연 벧엘지역아동센터장은 “센터에 온 지 1년 됐는데 마음의 문을 닫았던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진 상황”이라며 “올해는 승민이가 또래 친구들처럼 수다를 떨 수 있게 만드는 게 센터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점심시간.점심 메뉴로 검정콩밥,갈비탕,호두멸치볶음,가자미구이,김치,단감이 나왔다.승민이가 하루 중 유일하게 제때 식사를 챙길 수 있는 시간이다.센터에 오지 않으면 승민이는 하루 세 끼를 제대로 챙겨먹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승민이 엄마는 건강을 추스르기 위해 현재 직업이 없는 상태다.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승민이 가족의 수입 전부다.점심시간만큼은 승민이도 9살 개구쟁이로 돌아간다.친구들과 얘기도 나누고 선생님 질문에 대답도 하면서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워냈다.마음에 드는 반찬이 있었냐는 질문에 승민이는 “몰라요”라고 답했다.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말문을 연다.“양념삼겹살”.“우리 승민이가 양념삼겹살 좋아하는구나.다음에는 양념삼겹살 꼭 해줄게”라는 이주연 센터장 말에 승민이는 그저 씩 웃고 만다.

승민이에게 방학은 그다지 즐거운 기간이 아니다.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여러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친구들과 달리 승민이는 ‘집과 센터’를 반복하는 게 방학을 보내는 방법이다.수업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되지만 집에서도 사실상 혼자 있다시피 하는 승민이는 센터가 문을 닫는 오후 6시까지 있을 때가 많다.묻는 말에 “몰라요”,“싫어요”를 반복해도 승민이는 “센터에서 노는 게 좋다”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학교,엄마와 함께 있는 집은 그 다음이란다.이주연 센터장은 “말은 그렇게 해도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집에 가겠다’고 하는 걸 보면 엄마 품이 좋은 9살 아이”라고 덧붙였다.

 

이곳 지역아동센터에는 한부모,맞벌이 부부 자녀 등 주변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다.강원 지역아동센터 지원단에 따르면 도내에는 지역아동센터 168개소에서 아동 4400여 명을 보호하고 있다.춘천이 33개소로 가장 많고 원주 31곳,강릉 20곳,동해,14곳,태백 12곳 순이고 양구가 1곳으로 가장 적다.지역아동센터는 정부·지자체 지원금과 독지가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폭넓은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이주연 센터장은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이들이 기초생활수급자나 혹은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것은 맞지만 또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바라보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며 “지역아동센터 이용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그 자체로 약자이고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임을 어른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마술사가 꿈이라던 승민이는 손 끝이 야무지고 꼼꼼하다.레고로 자동차를 만들 때도 절대로 허투로 조립하지 않는다.우선 자동차 바퀴 4개를 일일이 찾아 맞춘 다음 본체를 만들고 지붕을 올린다.“자동차를 만들어도 바퀴가 없으면 못 굴러간다”며 자동차 바퀴를 찾지 못하면 원하는 크기와 모양이 나올 때까지 레고더미를 뒤지고 또 뒤지는,아이답지 않은 인내력도 지녔다.승민이도 이제 한 달 후면 초등학교 2학년 형이 된다.1학년 동생이 생기는 승민이의 올해 소원은 무엇일까.새해 소원을 묻는 질문에 또 “몰라요”라고 말한 후 한동안 가만히 있는 승민이.한참후에야 옆에 다가와 입을 뗀다.“새해에는 받아쓰기 90점 받고 싶어요.90점 받으면 엄마한테 자랑할거에요”. 오세현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