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재은

한림대 교수

일년 반쯤 전에 작은 모임에서 공동체 규범을 깬 구성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그러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한국 특유의 문화규범으로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서둘러 봉합됐다.그런데 그렇게 봉합된 문제는 일년 반 후 더 큰 문제를 가져왔다.처음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서로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문제를 직시하며 왜 그것이 문제인지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문제는 또다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대부분은 서둘러 수습책을 찾고 갈등을 봉합하고 더 단단해진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 한다.옳고 그름의 정의(正義) 차원의 문제를 인간관계 차원의 갈등과 화해,용서의 프레임으로 성급히 치환시켜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본질의 외면, 갈등의 회피와 화해조급증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2017년 현재 우리는 지난 오랜 역사동안 쌓여온 적폐들이 적나라하게 민낯을 드러내는 역사적 순간을 통과하고 있다.이 정권의 문제를 넘어 우리들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문제가 좀비처럼 남아 우리의 생존기반을 잠식하고 위협하고 있다.한국은 과거의 잘잘못에 대해 사회적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분명히 하고 상벌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그 결과 사회적 신뢰 수준이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이다.갈수록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팍팍한 사회가 되고 있다.사회공동체 이익을 먼저 또는 함께 고려하기보다,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인을 조장하고 양산하는 사회에서는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의 변칙적인 파고를 넘기 어렵다.파편화된 개인의 처참한 깨짐이 있을 뿐이다.

반면 독일은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했다.나치 전범에 대한 단호한 단죄를 하는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했고,과거의 역사적 잘못을 청산하고 결별하는데 막대한 사회적 에너지를 투자했다.이를 통해 독일은 사회적 신뢰와 시민의 높은 도덕적 수준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얻었다.오늘날 독일이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높은 성과를 보이고 높은 삶의 질과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우연한 성과가 아니다.

세월호 사고를 생생히 목도하며 이것은 단순히 학생과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안타까운 재난사고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세월호 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으로 구분될 만큼 사회시스템과 사회의식 및 문화 전반의 측면에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철저한 진상규명은 물론이고,정부,기업,개인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고질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메커니즘을 밝히고 철저히 반성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더 이상 일그러진 과거유산의 좀비들과 조우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그러나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정부의 접근방식은 여전히 서둘러 봉합하고 갈등을 무마하는 데 초점이 있다.눈 앞에 펼쳐진 문제상황을 불편해하고 그 안에서 당연히 발생하게 되는 갈등을 힘들어한다.심지어 세월호 유가족에게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가해자의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며칠 전 타계한 세계적 석학 바우만(Bauman)은 현대 사회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분석했다.사람들은 그에게서 희망을 듣고 싶어했지만,그는 섣불리 희망을 얘기하지 않았다.참담한 현실의 민낯을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가 이 현실에 맞서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진다고 믿었다.바우만의 통찰과 같이,고통스럽더라도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철저히 제대로 다루는 것이 우리가 희망의 미래를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약력=△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 △한림대 SMART 고령친화서비스사업단장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운영위원 △한국노인복지학회 학술부회장 △한국노인복지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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