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 묘소 대명당, 후손 관로 순탄 ‘청백리’ 삶 영위
대명당 자리한 곰솔 산천단 제단 호위
조부모 묘소 정승판서 급 역량의 혈처
이약동 부부 묘소 역량 후손 관직 맡아

▲ 제주 산천단 전경.정초에 한라산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이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은 대명당에 자리하며,제단의 연륜을 말해준다.
▲ 제주 산천단 전경.정초에 한라산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이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은 대명당에 자리하며,제단의 연륜을 말해준다.
필자가 숙박했던 콘도는 제주 애월 어음리의 바리메오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밤새 내린 눈으로 주변이 온통 설경이다.눈 위를 걸어보니 발목이 빠질 정도였다.이런 상황에서 차량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콘도를 빠져 나와 대로인 평화로에 진입했다.다행히 제설작업이 잘 되어 차량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그래도 기상상황을 예측할 수가 없으니 산천단에 들러 안전을 기원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웬걸 산천단 진입도로에는 강풍을 동반한 눈발이 무섭게 몰아치고 있었다.역시 아라동 소산오름의 기슭에 자리한 산천단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제주인들은 탐라국때부터 정월이면 백록담까지 올라가 산신제를 올렸다.고려 말에는 아예 나라가 주관하는 제례로 발전했고,조선에 들어와서도 제주목사가 제례를 주관했다.그렇지만 한겨울 백록담까지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춥고 길이 험해 인명 사고가 빈번했고,날씨가 사나워 올라 갈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이약동 선영 맥로는 묘소를 기준으로 외청룡 하단에서 거슬러 올라와 조부모 묘소에 크게 혈을 맺었다.
▲ 이약동 선영 맥로는 묘소를 기준으로 외청룡 하단에서 거슬러 올라와 조부모 묘소에 크게 혈을 맺었다.
조선 성종 1년 (1470)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약동은 이런 사실을 알고 현재 위치에 제단을 만들고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제례는 형식이 아니라 정성으로 지내야 한다는 혁신적인 조치였다.이것이 산천단의 유래다.예전에는 포신묘(脯神廟)라는 사당,소림사(小林寺)라는 절과 소림과원(小林果園)이란 과수원이 있어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이런것이 사라지고 소박한 제단과 이약동 목사가 건립한 작은 비석만 남아있을 뿐이다.
산천단 주위에는 제단을 만들 당시 심었다는 수령 500∼600년으로 추정되는 곰솔 여덟 그루가 산천단의 역사와 함께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곰솔은 주로 바닷가에 자라기 때문에 해송(海松)이라 불리고,껍질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이라고도 한다.거친 비바람과 싸우며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의 기상과 어울리는 강한 생명력의 곰솔은 지금도 산천단의 상징목으로서 제단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산천단 전체가 명당이다.제례를 지내는 단(壇)이 설치된 곳은 양택 명당으로 부족함이 없는 곳이지만,진정한 대명당 혈처에는 곰솔나무가 자리하고 있다.이곳은 한라산 정상에서 출발한 맥로가 북진(北進)을 하며 낙맥(落脈)한 뒤,서삼봉을 경유하고 계속 진행하여 소산오름에 이르러 분맥(分脈)을 하니,주혈은 산천단(사진의) 오른 쪽 곰솔이 자리한 곳에서,차혈(次穴)은 산천단(사진의) 왼쪽 비스듯한 곰솔이 자리한 곳에서 대혈을 맺었다.제단 좌우로 대명당에 자리한 곰솔이 제단을 호위하니 산천단의 제단과 제례의식은 오래 오래 이어질 것이다.많은 이들이 산천단에서 안전도 기원하고 명당기운도 마음껏 받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이약동(李約東 ; 1416∼1493)의 본관은 벽진(碧珍),자는 춘보(春甫),호는 노촌(老村).어릴 적의 이름은 약동(藥童)이었으니,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이약동은 문종 1년(1451)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을 맡기 시작했다.본래 성정이 부드럽고 인자하여 지방관으로 재임 시,가는 곳마다 칭송이 따랐다.성종 1년에 제주목사가 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려고 산천단을 개설하고,귤 재배를 장려하여 민생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또한 조정에 건의하여 세금을 감면 받도록 했고 휘하 고을 수령들이 사냥할 때 임시 거처를 지어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이약동 목사가 제주를 떠날 때,쓰던 모든 물건을 관청에 두고 말채찍 하나 가져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후에 섬사람들은 이를 보배처럼 간수하여 매번 목사가 부임하면 그 채찍을 내어놓았다.세월이 오래돼 부서지니 화공(畵
工)을 시켜 그 채찍을 그려서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약동 목사는 제주를 떠난 뒤에도 제주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제주의 목마(牧馬)를 건의하기도 했다.대사헌이 돼 천추사(千秋使)로 명(明)에 다녀오기도 했다.이후 전라관찰사,이조참판,개성유수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른다.40년간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지만,만년에 하로촌(賀老村)에 낙향하여 살 때는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1493년,이약동이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성종은 평정(平靖)이란 시호를 내렸다.훗날 육당 최남선은 그를 우리나라 최고의 청백리로 꼽기도 하였다.
▲ 경북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의 이약동 선영.왼쪽 묘소는 조부모,오른쪽  두 기가 이약동 부부 묘소다.
▲ 경북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의 이약동 선영.왼쪽 묘소는 조부모,오른쪽 두 기가 이약동 부부 묘소다.
선생의 선영이 경북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뒷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섰다.속칭 묵방골이란 마을에 가서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마을에서 남쪽으로 구불구불한 소로를 따라 1㎞를 내려가다 조그만 저수지를 지나 북쪽을 바라보니 첩첩한 골짜기의 높은 곳에 선생의 선영이 보였다.짧은 겨울 해가 떨어질까 조급한 마음으로 선영을 둘러봤다.
이약동 조부모 묘소가 대명당이다.지금 기준으로 정승판서도 충분한 역량의 혈처다.조부모 묘소의 역량이 손자의 40년간 순탄한 관로(官路)를 지켜준 셈이다.이약동 부부 묘소도 명당에 자리하니 후손들이 대를 이어 관직을 역임했다.많은 사람들은 이약동 선영은 대덕산 준령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고 말하지만,그것은 외관적인 만두형세에 불과한 것이다.풍수의 핵심인 맥로는 묘소를 기준으로 외청룡(外靑龍) 하단에서 거슬러 올라와,조부모 묘소에 크게 혈을 맺었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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