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석재은 한림대 교수
“아픈 사람을 보듬지 못하고 더 아프게 하는 제도와 집행자는 그 존재이유를 잃은 것이다.”

▲ 석재은 한림대 교수
▲ 석재은 한림대 교수
‘뭣이 중헌디, 뭣이!’ 지난해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 나온 대사이다.혼돈과 혼란 속에서 질서를 세워주고 각성을 촉구하는 일성(一聲)이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정신없이 삶에 밀어닥치는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게 된다.더욱 심각한 것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되는 경우이다.
얼마 전 상영된 ‘나, 다니엘 브레이크’ 라는 영화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영국의 사회복지현장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복지 법제도와 법제도 집행자들이 실제로는 인간의 삶을,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데 얼마나 허술한지,정작 그 과정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인간들을 얼마나 철저히 소외시키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영화 속 주인공 다니엘 브레이크는 웅변한다.“나는 다루기도 생소한 컴퓨터로 상담을 신청해야 비로소 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존재여서는 안 되며,일을 계속하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무릅쓰고서라도 일하려는 노력을 입증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도움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또한 나는 사회복지급여가 근로의욕을 훼손하지 않도록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듯이 보이는 여러 제도들 사이에서 미아(迷兒)가 되어,결국 어떤 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여선 안 된다.나는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그 자체로 존엄(尊嚴)한 인간 ‘다니엘 브레이크’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회복지학자로서 너무나 불편하고 부끄러웠다.사회공학적으로 설계된 사회안전망이 논리적 알고리즘에 따라 사각지대 없이 촘촘하게 작동할 거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사회정책학자의 순진한 착각인지를 여지없이 깨주었다.사회복지 법제도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그러나 현실은 인간애를 바탕으로 따뜻한 관심과 배려로 재량권을 발휘하는 전문가보다는 인간미를 제거한 기계적인 집행자를 마주하게 된다.법제도의 온갖 기준만이 살아 움직이고 정작 살리기 위한 사람들은 박제된 기준에 의해 질식되어 간다.아픈 사람을 보듬지 못하고 더 아프게 하는 제도와 집행자는 그 존재이유를 잃은 것이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思惟) 없이 법제도의 충실한 집행자로서 죄의식 없이 많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했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아이히만이 보여주는 지독한 평범함과 진부함,주어진 자기 일에 매몰되어 사회적 맥락에 대한 사유의 불능,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사유의 불능이 초래한 무서운 결과를 유념해야 한다.우리 각자가 각성하여 ‘아이히만’이 되지 않도록 악의 평범성을 경계해야 한다.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아픈 실직자 ‘다니엘 브레이크’와 싱글맘 ‘케이티’와 아이들의 존엄을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내야 한다.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사회공동체의 집단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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