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출신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열여섯살에 중 위안소로 끌려가
일본군에 맞아 고막 손상까지
해방 후 돌아온 고국도 생지옥
2007년 통한의 세월 낱낱히 고발
제98주년 3·1절을 이틀 앞둔 27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김군자(91) 할머니는 봉사자들에게 한숨을 내쉬며 나즈막이 말했다.1926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열여섯 살 때 ‘긴카쿠 위안조’라고 불리는 중국 길림성 훈춘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그는 3년 동안 시련을 겪었다.16세 소녀가 갇힌 방 문 앞에는 조를 짜서 트럭을 타고 온 일본군 장교와 일반 군인들의 줄이 주말에도 끊이지 않았다.그렇게 꽃다운 소녀의 삶은 부서졌다.김 할머니는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야 성(性)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0년 전,다리 수술을 해 거동이 불편한 김 할머니는 요즘 부쩍 기력이 떨어졌다.고향에 대한 기억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그러나 김 할머니는 76년 전의 악몽은 몸서리 처질 정도로 생생하다.조실부모한 김 할머니는 “철원의 어떤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지.그러다 중국으로 끌려갔는데 고막이 터졌어.방에 들어온 일본군 장교가 귀를 후려쳤어.귀가 잘 안들려.감시가 심했는데 도망가려다 붙잡혀서 죽도록 맞았어”라며 힘겹게 말했다.
가슴 속에 날선 기억을 품고 김 할머니는 해방 후 강원도로 돌아왔다.강릉,삼척,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억척같이 살아보려고 했다.그러나 따가운 시선만 존재한 이 곳 역시 생지옥이었고,역사의 증인들이 살아있음에도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삶을 내려놓고 싶었다.61세 때 까지 자살을 7번이나 시도했다.
김 할머니가 다시 삶의 용기를 낸 것은 감추지말고 이 고통을 세상에 알리자는 신념 때문이다.지난 2007년 미국 하원이 주관한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나가 통한의 위안부 생활을 낱낱이 고발했다.김 할머니는 나눔도 실천 중이다.열세살 때 고아가 된 그는 정부 보상금 중 장례비용 500만원만 남겨놓고 지난 2007년 아름다운재단에 1억 원을 쾌척했다.그는 “이 돈이 나처럼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의 배움에 쓰였으면 좋겠다”고 전했다.이제 할머니가 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너무 힘들어.우리는 돈을 원하는 게 아니야.그들이 저지른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 행위에대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끝까지 알려야 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