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의 개벽 시조 고을나·양을나·부을나 발상지
▶ 삼성혈
수령 500년 이상 고목 울창
현존하는 전설의 현장 ‘신비’
▶ 백조일손지묘
제주 4·3항쟁 체포 학살 현장
“묘역서 좋은 기운 분사 명당”

▲ 삼성혈은 고·양·부 3성 시조의 탄생설화와 제주의 아이덴티티를 간직한 곳이다.
▲ 삼성혈은 고·양·부 3성 시조의 탄생설화와 제주의 아이덴티티를 간직한 곳이다.
■ 삼성혈
고대 국가에는 개국신화가 있듯이 제주에는 탐라인의 발상지 전설이 있다.더욱이 그 전설의 현장이 현존하니 신비감을 더한다.바로 이도 1동에 자리한 삼성혈(三姓穴)이 그곳이다.탐라의 개벽 시조인 고을나(高乙那) ·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라는 삼신인(三神人)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개국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알에서 태어난 가야,부여,고구려,신라 등과 다르게 이들은 땅에서 솟았으며,동시에 세 명의 시조가 태어났다.
사방으로 하늘을 가릴 만큼 큰 나무들이 에워싼 중심에는 잔디밭이 있고,그 가운데 움푹 팬 구멍(혈) 세 개가 품(品)자 모양을 하고 있다.이 세 구멍에서 세 을나(乙那)가 나왔다고 한다.옛 이름은 모흥혈(毛興穴)이었다.이 구멍은 비가와도 빗물이 고이지 않고 눈이 내려도 그 안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위쪽 구멍은 둘레가 여섯 자이고 아래의 두 구멍은 각각 석 자인데 전하는 말로는 그 깊이가 바다 밑까지 통한다고 한다. 주위에는 수령 500년 이상의 노송과 녹나무 등 수십 종의 고목이 울창하게 서 있어 전설의 분위기를 더해준다.그리고 고목들은 신하가 읍(揖)을 하듯 혈을 향해 수그린 모양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실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은 화산지역의 특성이고 나무가 혈을 향해 기울어진 것은 향일성 때문이지만,이것이 삼성혈의 전설과 어울리니 더욱 그럴듯하다.
혈처(구멍)의 중심을 기준으로 곤(坤:서남방)방의 사라봉 지역에서 출발한 맥로가 완만하게 우선(右旋)으로 감아돌아 일도1동을 경유하여 혈처의 전면으로 진입하여 결혈하였다.발상지 전설이 신비롭게 채색될 정도에 상응하는 대명당이다.
수법(水法)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제주에는 풍수에서 거론하는 그런 길수(吉水)가 있을 수 없는 땅이며,강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는 지형이다.그럼에도 대명당이 많아 유명인의 배출이 끊이지 않고,복토를 일궈가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수법(水法)의 이론이 맞지 않는 증거이기도 하다
▲ 백조일손지묘.4·3사건의 후유증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했는지를 말해주는 유적이다.학살당한 시신을 수습하면서 뼈만 추려 봉분을 만든 공동묘지이다.
▲ 백조일손지묘.4·3사건의 후유증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했는지를 말해주는 유적이다.학살당한 시신을 수습하면서 뼈만 추려 봉분을 만든 공동묘지이다.
■ 백조일손지묘
제주도에 와서 백조일손의 묘를 보지 않는 것은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을 외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분들은 저승의 유택(幽宅)마저 편치 않은 곳에 자리한 경우를 많이 경험하였다.백조일손의 묘를 향하는 마음이 무거운 이유였다. 백조일손의 묘가 만들어진 사연은 4·3항쟁에서 비롯한다.1947년의 3·1절,일제 잔재의 청산과 자주통일 정부를 결의하는 대회가 관덕정에서 열렸다.많은 이들의 성원 속에 집회가 열렸으나 대치하던 경찰이 발포했다.이에 학생들은 동맹휴업으로 맞서고,민간은 파업을 하는 등 경찰의 사과를 요구했다.그러나 미군정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이 시민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며 2500명이 넘는 사람을 구금해 버렸다.이런 처사에 1948년 4월 3일,시민들이 저항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 바로 제주 4·3항쟁이다.
항쟁 발생 직후에는 군의 연대장과 봉기군 대표 사이에 평화협상이 진행되며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그런 와중에 서북청년단원들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이것을 봉기군의 소행이라고 덮어씌웠다.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협상을 추진했던 연대장은 해임되고 후임 연대장이 임명된 후에는 빨갱이 소탕의 구실로 제주 전역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1949년 초에 이르러 사태가 진정되는 듯했지만 곧이어 발생한 6·25침략전쟁이 발발했다.그러자 보도연맹 회원과 4·3항쟁 때 체포되었던 사람들을 예비검속의 미명하에 다시 체포하여 집단학살을 벌였다.백조일손의 묘에서 남쪽으로 1.7㎞ 떨어진 섯알오름이 학살 현장의 한 곳이란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족들은 유골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7년이 지난 1957년이 되어서야 현장을 찾아가니 서로 엉킨 유골들은 누가 누구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그래서 유골을 함께 모아서 묘를 만들고 백조일손지묘라 불렀다.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두 자손이 한 날,한 시,한 곳에서 죽어 하나의 뼈로 엉키어 한 자손으로 환생하시다”(지은이 이치훈 이성철)
제주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묘역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이곳을 감싸주는 사신사(四神砂)는 보이지 않는다.묘역 뒤로 십여리 떨어진 곳에 평지돌출로 솟은 삼방산은 풍수적인 영향과는 무관하다. 이곳의 맥로는 전면의 바다 먼 곳에서 출발하여 한참을 진행하다 대정 하모 지점에서 상륙하여 너른 들판을 지나 묘역의 바로 앞 좌측에 엄청난 기운을 결집하였다.이곳에서 묘역 전체에 좋은 기운을 분사해 주니 묘소 전체가 상당히 좋은 명당 혈처가 되었다. 이들은 원통하게 삶을 마감했지만,그 후손들은 훌륭한 인물로 제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이곳을 오기 전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 사계공동묘지
▲ 사계공동묘지
사계공동묘원 뒤로는 멀리 삼방산이 보이고 백조일손묘역과 연접해있다.이곳 또한 상당부분이 명당이다. 어떤 풍수학자는 조선의 산천지기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백두대간과 13정맥을 통하여 전국 각지의 산과 마을로 전해진다고 주장하지만 현장이 부재한 허구적 관념이다.산이 많고 평지가 좁은 제주도의 대명당들은 그 맥로의 발원이 바다에서 출발한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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