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진   수필가
▲ 황장진
수필가
“11시부터 보금자리 401호 가스 점검 나온다고 했나요?” “맞아요,11시부터 11시 반 사이에… 그런데 304호 가스점검을 왜 함께 신청하지 않았는지 몰라요.함께 했으면 그들도 좋아할 텐데… 내가 왜 이러는지 참 한심해요!” “그럴 수도 있지 뭐.”
“오후 2시경에 태양열 전열 판이 80도가 넘어가면,불 한 번 돌리세요.” “걱정하지 말아요,잘 다녀와요.” 대답이야 시원하게 못 하랴,돈이 들어가,밥이 들어가?
수필집에 정을 쏟고,PC에 혼을 놓다 보면 어느덧 오후 3시가 훌쩍 넘는다.‘어이쿠!’옥상으로 부리나케 뛰어오른다.태양열판 창고 문을 화닥닥 연다.환풍기가 왱왱 아우성치며 눈을 부라린다.“느림보 아저씨,왜 이제 왔어요? 왱왱! 왱왱!” 계기판 온도가 90도를 훌쩍 넘었다.내 신용도가 -90으로 확 떨어지는 느낌이다.
“서연 할아버지,세탁기에 이불 빨래가 돌고 있으니 다 되면 옥상 빨랫줄에다 좀 널어 줘요.” “걱정하지 말아요,볼링이나 잘 굴리다 오기요.” 이리 뒤척거리고 저리 뒤척거리다 보니 꿈나라로 가서 온 사방 헤매고 만다.‘어이,낮잠 한번 잘 잤다!’벽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12시 5분 전이다.들이닥칠 때가 되었다.뭔가 마음속으로 찜찜하다.‘뭘까?’‘야! 큰일 났다.빨래 꺼내 널어달라는 부탁,꿩 까먹고 말았다.’세탁기를 열어젖히니 동그란 이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째려본다.“아저씬 3시 3끼 밥은 잘 얻어 자시더니만,아주머니의 요런 쉬운 부탁 하나 잘못 들어줘요?” “자네도 나이 먹어 봐,이럴 수도 있어.”
지난 25일은 글 벗 최 교장 맏이 결혼식 날이었다.닷새가 지나서야 책상 위 잡동사니를 뒤지다 보니 낯익은 청첩장이 나타났다.‘아뿔싸! 놓쳤구나!’“안녕하십니까? 최 교장 전화지요? 어쩌다가 그만 혼사 날짜를 잊었습니다.미안합니다만,계좌번호 좀 알려 주십시오.” “누구신데요?” “사모님이시지요? 늦게나마 축하합니다.글 모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네,바깥양반에 물어보고 알려주겠습니다.” “네,부탁합니다.” 앞으로 청첩장에는 축의금 보낼 계좌번호를 새겨 주면 편리하겠다.그건 안 된다고? ‘청첩장=고지서’인상을 준다고?
화장실에서 작은 볼일을 보고서,다음에 한 번 더 본 뒤 물을 내리려고 뚜껑을 덮어둔다.얼마 후에도 세수하는데 물줄기가 약해지는 게 싫어서 뒤에 내리려고 뚜껑을 덮고 만다.“수빈 할아버지! 제발 물 제때 좀 내리세요.그까짓 물값 얼마나 나온다고…” 사흘이 멀다고 꾸지람을 사서 듣는다.
나들이할 때는 갖고 갈 것들은 미리미리 외출복 주머니에다 챙겨 넣는다.출입문 곁에다 갖다 놓기도.‘요거야 잊으려고?’하면서 탁자 위나 책상 곁에 둔 건 잊을 때가 종종 있어서다.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린 일이 십중팔구였다.직장생활 할 때는 잊어먹어도 모른 체 잘도 넘어가더니만 이제는 딸딸이 챙겨서 묵비권 행사하는데 질렷다.손전화 S 플래너와 벽걸이 달력의 12월 24일엔 ‘정신 차려!’라고 뚜렷이 표시해 놨다.이날만은 ‘그럴 수도 있지 뭐’가 안 통하기에 정신 바짝 차리고 아양을 떨어야 한다.‘강라의 글씨 색깔을 청색으로 바꾸면 어떨까?” 혜빈 아비께 보낸 카톡의 문자다.‘강라’는 강원대학교 카페 이름으로 ‘강원대학교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인데 줄여서 ‘강대 Like’즉 ‘강라’라 부른다.원룸 안내로 많이들 이용하고 있다.‘강라 글씨 변경,안 된다고 저번에 이야기 드린 거예요.’
2월 가족회의에서 알린다.“너희들 들어 봐라.이제 우리 둘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쉬 잊기를 잘하는구나.한 번 한 얘기를 또다시 할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이해해라.하지만,요즘 제 욕심만 차리려는 지도자들 뜻은 따르지 말아라.나라의 앞날이 큰 걱정이다.이건 절대로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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