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숙   전 춘천여성민우회 대표
▲ 박미숙
전 춘천여성민우회 대표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에게 물었다.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여성으로 살고 싶은지,남성으로 살고 싶은지.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남자”라고 답한다.다른 성으로 살고 싶진 않느냐 물어도 처음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여자로 살면 ‘불편할 것’ 같다는 게 이유다.아이에게 한국사회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현실은 아이의 표현대로 불편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기에 씁쓸하다.
아이 눈에 비친 여성의 불편한 삶은 어떤 것일까.화장이나 다이어트 같은 외모관리와 관련된 제품들이 복잡다양하고,날마다 변신하는 여성의 화려한 모습 뒤에 감춰진 노력이나 번거로움을 일찍이 알아챘던 걸까.여성으로 살기가 이 정도 불편함이라면 나는 그다지 우울하진 않겠다.아름다움에 대한 여성의 관심과 표현은 사회적 요구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는 엄마의 잔소리와 하소연 속에서 그 고단한 임무를 파악했을 지도 모른다.엄마는 출근해서도 형제의 학원 스케줄을 챙겨야 하고,퇴근해서는 그날그날의 숙제와 준비물도 챙겨야 하고,친구 엄마들과 교육정보도 나눠야 하고,친척 대소사도 챙겨야 한다는 것을.그리하여 때로 직장일과 집안일로 피로와 스트레스가 정점에 이르면 집안은 한바탕 태풍이 불고 전운마저 감도는 것을 이미 경험했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알고 있는 여성의 불편한 삶은 여기까지면 좋겠다.갖가지 신조어를 만들며 확산되는 여성혐오,‘데이트 폭력’ ‘성폭력’ 같이 끔찍한 사건사고,여성 몸을 도구화하고 상품화한 동영상 같은 것은 되도록 몰랐으면 좋겠다.혹여 알게 된다 해도 그것은 열등감에 빠진 일부 남성들의 비뚤어진 우월주의거나 불법적인 사건이라 법적인 처벌을 강화하고 단속하면 개선될 여지가 있고,피해 여성들이 일부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5학년 소년이면 알지 못하는 한국 여성의 진짜 불편함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거다.여성 전반에 걸쳐,생애의 장기간을 지배하며,극복하기 쉽지 않은 덩어리로,그것은 불편함을 너머 고난의 길일지 모른다.각종 통계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남녀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여성은 남성 임금의 64%)로 OECD 평균 격차에 두 배에 달한다.저임금 비율이나 계층별 소득 비율 같은 다른 비교항목들보다 더 큰 격차를 보인다.더구나 법으로 보장된 일과 가정 양립제도는 실효성이 높지 않아 대다수 여성들은 육아휴직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여성에게만 가중되는 일·가정 양립정책은 이중고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여성들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차별의 장벽에 맞선다.지난 3월 8일은 109주년 ‘세계 여성의 날’이다.세계 80여개 국가에서 여성들은 불평등과 성차별,여성 혐오에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다.뉴욕 월가의 증권거래소 앞에는 ‘겁 없는 소녀상’이 세워졌다.여성 리더십 파워를 알리고 기업 내 여성 간부의 비율을 높이자는 취지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3월은 특별하다.‘여성의 날’은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하라며 조기 퇴근 시위를 벌였다.여성 노동을 남성과 동일 임금으로 적용하면 오후 3시 이후는 무급으로 일하는 셈이라 ‘3시 STOP’ 행진에 나섰다.
그리고 3월 10일.이정미 헌법재판관은 피고인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탄핵선고문을 낭독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여성재판관의 뒷머리에 포착된 분홍 헤어롤은 아주 사소한 실수면서도 큰 의미가 되었다.서둘러 일터로 나가야 하는 이 시대 워킹맘의 바쁜 일상을 상징적으로 담았으며,세월호 침몰 당일도 머리손질로 시간을 보냈던 ‘준비된 여성 대통령’의 무능함과는 대조된 모습이기에 그렇다.여성의 달,여성의 행복한 삶을 위한 촛불혁명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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