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계 후손이 창건한 교토의‘청수사’ 대명당 정혈
10만대군 이끈 정이대장군 사카노우에
적 정벌 공로 청수사 왕실 원당 승격
사카노우에 묘소도 근동 주혈 대명당

▲ 몇 년째 보수 중인 청수사 무대(舞台)와 왼쪽으로 보이는 삼중탑.
▲ 몇 년째 보수 중인 청수사 무대(舞台)와 왼쪽으로 보이는 삼중탑.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를 보지 않으면 교토를 봤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일년에 교토를 찾는 약 800만명의 관광객 중 60%가 청수사를 방문한다고 하니 말이다.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네다섯 구간을 지나 청수도(淸水道)에 하차하면 청수사 길(淸水坂)이 눈에 띈다.골목을 따라 350여 m를 올라가면 산넨자카(三年坂)로 이어진다.골목 양쪽으로는 전통이 살아있는 가게들이 이어져 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광객들로 골목길에는 활기가 넘친다.산넨자카가 끝나는 지점에서 청수사를 만난다.
필자가 청수사를 찾은 것은 그 유명한 ‘청수의 무대(舞台)’ 전설때문만은 아니었다.백제 도래인 후손인 사카노우에가 이 절을 창건했다는 역사적 연고와 어떤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풍수적 호기심도 작동했다.협소한 공간에 본당을 앉히고 그 앞의 가파른 벼랑에 391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무대(舞台)를 설치하여 산속의 아름다움과 교토 시내를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는 ‘청수의 무대’라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명당은 넓고 안정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파른 지형에 자리하고 있는 청수사는 교토 최고의 양택 대명당이다.
▲ 청수사 창건에 일조한 사카노우에 장군 묘소.
▲ 청수사 창건에 일조한 사카노우에 장군 묘소.
풍수적으로 살펴보면,청수사로 진입하는 맥로의 출발은 교토와 연접한 오사카 북단의 산간지역에서 출발하여 교토의 남쪽과 동쪽 끝의 산맥을 경우하여, 교토 동쪽 교외인 시나가와(山科)지역을 횡단하여 청수사 뒷산으로 낙맥한다. 본당은 천하대지의 대명당의 정혈에 자리하고, 관문격인 인왕문(仁王門), 붉은 주칠을 한 삼중탑(三中重塔), 개산조인 엔친와 사카노우에 부부상(像)을 모신 개산당(開山堂) 모두가 대명당이고, 심지어 산넨자카(三年坂)의 가게들도 명당판 안에 들었다. 청수가가 이런 대명당에 자리한 것은 일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청수사의 창건 이야기와 사카노우에에 대하여 살펴보자.
일본 헤이안 시대의 설화집인 에 실린 이야기다.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坂上 田村麻呂, 758~811년)는 청수사 아랫마을에 살고 있었다. 출산한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자 산후조리에 좋다는 사슴을 사냥하여 귀가중이었다. 산중에서 들리는 청아한 소리바 끌려 가보니, 폭포 아래에 엔친(延鎭)이란 스님이 독경 중이었다. 엔친은 이곳에 절을 세우려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카노우에는 살생을 범한 죄를 참회하기 위하여 엔친과 힘을 합하여 2년만에 청수사를 세웠다. 그 덕에 부인의 건강도 좋아지자 사카노우에 부부는 절에 관세음상을 바쳤다. 이 불상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참배객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청수사 개창의 전설을 간직한 오토와노기타(音羽の瀧). 샘물을 마시기 위해 기다리는 장사진의 행렬. 두 가지 소망은 들어준다는 전설이 여전히 유효한가보다. 이 곳도 엄청난 대명당에 자리한다.
▲ 청수사 개창의 전설을 간직한 오토와노기타(音羽の瀧). 샘물을 마시기 위해 기다리는 장사진의 행렬. 두 가지 소망은 들어준다는 전설이 여전히 유효한가보다. 이 곳도 엄청난 대명당에 자리한다.
당시 조정은 동북방에 자리하고 있는 에조족(蝦夷族, 아이누족)의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들은 조정의 가혹한 세금과 부당한 간섭에 난을 일으켰고 조정은 원정군을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797년, 조정은 다시 오조를 정벌하기 위하여 사카노우에를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하는데, 이는 그의 가문은 백제계 도래인 후손으로 대대로 군사(軍事)를 담당해 왔기 때문이다. 사카노우에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자 에조족은 항복을 선언하고, 사카노우에는 개선장군으로 돌아왔다.그의 공로를 높이 산 천황은 넓은 부지를 하사하고 왕실의 원당(願堂)사찰로 승격하니,작은 사찰에 불과했던 청수사는 어원사(御願寺)로 격상하였다.국민적 영웅이 된 사카노우에의 인기에 힘입어 청수사의 참배객들이 늘어났다.이후 청수사는 소실과 재건, 파괴와 복원을 거듭했고, 오늘날의 모습은 에도시대인 1633년에 재건된 것이다.
청수사를 보고나니 사카노우에의 묘소가 궁금해졌다. 백제계 후손이며 자랑스런 우리의 선조를 찾아나섰다.교토역에서 다이고지(醍寺)행 버스를 타고 동쪽방향으로 25분쯤 가서,야마시나(山科)구의 오오시이신사 정류장(大石神社前)에서 하차하여,대로를 따라 10분 걸으면 오른 쪽에 사카우에 공원이 있고 사카노우에의 묘소가 공원 안에 있다.사카노우에 묘소에는 정이대장군 판상전촌마려공묘(征夷大將軍 坂上田村麻呂公墓) 라는 비석이 선명하다.백호방 먼 곳에서 출발한 맥로가 거의 직선으로 행도, 진입하여 정확히 결혈하였다.근동의 주혈인 대명당이다.묘역은 메이지 20년(1887), 헤이안 천도 천백년을 맞이하며 정리한 것이다.이국 땅에 묻히신지 1200년이 지났지만 가까운 내 조상같고 일본이 남의 땅이 아닌 느낌이었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