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완   철원부군수
▲ 박종완
철원부군수
지난 3월 21일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충렬사에서는 위 두분 홍명구 장군과 유림 장군을 모시는 춘계 제향이 지역유림과 후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됐다.그날 따라 가는 겨울이 아쉬운지 꽃샘 추위 속에 봄비가 경내를 촉촉이 적셨고 북측의 대남방송도 꽤나 웅웅거렸다.지금부터 380여년전인 1636년(인조14)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는 13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국경을 넘은 청 태종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 등 조선군 주력부대를 우회하며 10여일 만에 한양 근교에 도달한다.이에 다급해진 인조는 급히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한다.인조는 청군에 포위된 채 근왕군을 기다리며 47일간 농성을 한다.그러나 기다리던 근왕군은 남한산성 근처에서 전멸을 당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인조는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병자호란의 역사적 개략이다.병자호란하면 주화파와 주전파의 국론분열과 삼전도의 치욕만을 기억한다.이 역시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그러나 병자호란은 패전만 있었던 역사는 아니다.인조가 항복하기 이틀 전 김화에서는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병마절도사 유림 장군이 이끄는 근왕군이 청나라 팔기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이 전투에서 관찰사 홍명구 장군은 전사를 하였고 병마절도사 유림 장군은 승리 후 근왕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 항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그 후 1650년(효종1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홍명구 장군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렬사가 세워졌다.1940년에는 김화지역 유림들의 합의에 의해 함께 싸웠던 유림 장군의 위패도 충렬사에 모시게 되었고 매년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김화 백전대첩’으로 알려진 이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용인 광교산 전투와 함께 유일하게 조선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한다.그러나 병자호란이 패전의 역사로 인식되다 보니 ‘김화 백전대첩’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승전의 역사로 남아 있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잊어야 할 부끄러운 역사도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하물며 기억해야 할 역사를 잊고 지낸다는 것은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그 중 하나가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다.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김화 백전대첩’도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몇년 전 비록 역사성은 부족했지만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최종병기 활’이 700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그날 두 분 장군에 대한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한편의 영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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