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병자호란의 역사적 개략이다.병자호란하면 주화파와 주전파의 국론분열과 삼전도의 치욕만을 기억한다.이 역시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그러나 병자호란은 패전만 있었던 역사는 아니다.인조가 항복하기 이틀 전 김화에서는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병마절도사 유림 장군이 이끄는 근왕군이 청나라 팔기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이 전투에서 관찰사 홍명구 장군은 전사를 하였고 병마절도사 유림 장군은 승리 후 근왕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 항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그 후 1650년(효종1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홍명구 장군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렬사가 세워졌다.1940년에는 김화지역 유림들의 합의에 의해 함께 싸웠던 유림 장군의 위패도 충렬사에 모시게 되었고 매년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김화 백전대첩’으로 알려진 이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용인 광교산 전투와 함께 유일하게 조선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한다.그러나 병자호란이 패전의 역사로 인식되다 보니 ‘김화 백전대첩’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승전의 역사로 남아 있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잊어야 할 부끄러운 역사도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하물며 기억해야 할 역사를 잊고 지낸다는 것은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그 중 하나가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다.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김화 백전대첩’도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몇년 전 비록 역사성은 부족했지만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최종병기 활’이 700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그날 두 분 장군에 대한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한편의 영화가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