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심노숭(1762~1837)은 묻는다.눈물은 눈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 속에 있는가? 눈 속에 있다고 한다면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것과 같을까. 마음 속에 있다고 한다면 핏줄을 타고 피가 흐르는 것과 같을까. 눈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눈만이 주관함으로 눈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눈의 작용으로만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음으로 마음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네 살 난 딸과 아내를 연이어 뒷산에 묻은 심노숭이 1792년 여름 서른살에 쓴 ‘누원’(淚原·눈물의 근원)에 나오는 사변적인 글이다.

기억은 머리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 속에 있는가. 머리 속에 있다고 한다면 도서관 서가의 책처럼 차곡차곡 있는 것과 같을까. 마음 속에 있다고 한다면 신경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것과 같을까. 머리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기억이 나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머리만이 주관함으로 머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의 작용으로만 기억이 나는 일은 없음으로 마음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기억이 마음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왜 옛 사람들은 생각하고,기억하고,추억하고,잊지 못하는 억(憶)자에 마음 심(心)을 두개나 그려 놓은 것일까.

어버이날 찾아뵌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는 더 작아져 계셨다. 흑단같던 머리결은 이제 눈처럼 희고 정정하시던 어깨는 고향 언덕 늙은 소나무처럼 구부정하시다. 그래도 갓 스물에 강 건너 홍천 모곡으로 시집가시던 67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또 신혼에 신랑을 전장에 내보내시고 시어머니와 코흘리개 시동생들을 줄줄이 잡고 여주로 피난을 가 남의 농사일을 거들고 길쌈을 도우며 6.25 피난살이 하시던 일을 어제일처럼 분명히 추억하신다. 그리고 산 설고 물 설은 서울에 올라와 손수 키워낸 손녀들의 23년전 어릴적 모습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하지만 방금 하신 말씀은 기억하지 못하시고 한번 하신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신다. 대학생 손녀에게는 언제 결혼을 하냐고 물으시고 또 물으신다. 할머니의 똑같은 물음마다 매번 정성껏 대답하는 큰딸이 어여쁘고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반백의 아들은 눈물을 삼킨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하는,아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의 형무소에 갇혀 기억의 죄수가 되기도 한다. 역사에서 왕(王)이 아니라 군(君)으로 기록될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에 갇혀 살았다. 집권내내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 시절 인물들을 데려다 참모로 기용했다. 대통령을 21세기 지도자가 아니라 왕조시대 왕으로 떠받드는 인물들이었다. 그는 기억의 포로가 되어 과거로 되돌아갔다. 결과는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민의 불행으로 종결됐다. 집권 일주일을 맞은 문재인 대통령은 미래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다. 청와대는 북악산의 신록처럼 젊어졌고 국민과의 소통은 상식처럼 기본이 됐다. 우리는 이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에게도 잊지 못하는,아니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2009년 5월23일. 지기이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서거일이다. 문 대통령은 평소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유서는 집권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에너지였다. 하지만 이젠 노무현과 결별할 시간이다. 노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추억하되 그 그림자에 갇혀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박 전 대통령이 생생한 반면교사다. 요즘 백세청풍(百世淸風) 기운이 감도는 청와대를 오가며 드는 단상이다.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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