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지속발전은 동반자 GS그룹의 ‘풍수적 상보’ 영향
LG 구씨 선영 2대 걸쳐 ‘소지소혈’
GS 허준구 부부 묘소 대명당 주혈
LG와 분리후 자산·매출 증가 뒷심

▲ 허준구 회장 묘소.포천 마명리 공원묘원 소재.GS의 선대와 형제들의 묘소는 대부분 경남 진주에 모셨는데 허준구 회장은 파격적(?)으로 포천에 모셨다.
▲ 허준구 회장 묘소.포천 마명리 공원묘원 소재.GS의 선대와 형제들의 묘소는 대부분 경남 진주에 모셨는데 허준구 회장은 파격적(?)으로 포천에 모셨다.
명·청시대 누 백년간 중국 상단(商團)을 리드한 양대 집단은 산서(山西)를 기반으로 진상(晋商)과 휘주에 근거를 둔 휘상(徽商)이었다.
진상들의 근거였던 태원(太原)에는 궁궐을 방불하는 대원(大院)이 지금도 남아있다.10여년, 교치용(喬致庸 : 1818-1907)이란 실존인물을 주제로 한 교가대원(喬家大院)이란 드라마는 정치(精緻)하고 호방한 대상인의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대륙을 뜨껍게 달궜다.휘상들이 자리했던 곳은 지금의 황산 주변으로 예전에는 휘주(徽州)라 불렸다.홍정상인(紅頂商人) 호설암(胡雪岩), 대학자 호적(胡適),전 공산당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와 장쩌민(江澤民)의 조적(祖籍)도 이곳이다.
그들의 민가가 남아았는 서체(西遞)와 굉촌(宏村)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곳으로 휘주문화의 정취가 농후하게 남아있는 곳이다.그들이 거대한 상단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상매(商賣)가 아니라 유학(儒學)이란 지식으로 무장한 유상(儒商)이었기 때문이란 평가다.
그러나 진정한 유상(儒商)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업은 이 땅의 GS와 LG그룹이란 생각이다.2005년,GS가 LG에서 분리하여 독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세상에서는 그들 57년 동업을 아름다운 동행이라 불렀다.헤어질 때도 서로 덕담과 격려를 주고받았으니 아름다운 이별이라고도 하였다.돈이 개재되면 형제간에도 반목하는 것이 세상사이거늘,경상(經商)의 길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GS의 정신적 원류를 찾아가 보자.
▲ 허준 묘소.진주 천곡리 소재.생전에는 만석꾼의 삶을 살고,사후에는 대명당에 자리하여 후손들이 거상(巨商)이 될 수 있는 풍수적 뒷심이 되어준 대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 허준 묘소.진주 천곡리 소재.생전에는 만석꾼의 삶을 살고,사후에는 대명당에 자리하여 후손들이 거상(巨商)이 될 수 있는 풍수적 뒷심이 되어준 대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GS의 정신적 원류는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이다.그는 당대 만석꾼이었지만 멈출 줄 알고 삼가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유학자였다.1886년,진사에 급제하고 1903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냈다.지역사회의 구휼활동에 적극 참여하고,안희제의 백산상회에도 적지않은 자금을 출자했으니,이는 영리가 아닌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지원에 그 뜻이 있었던 회사였다.LG의 구인회,삼성의 이병철,효성의 조홍제 창업자가 졸업하여 유명한 지수초등학교 부지를 제공한 이가 허준이다.
허만정(1897∼1952)도 부친 못지않게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을 들은 지신정이 아들에게 물었다. “돈을 어떻게 썼느냐.” “한 번에 털어 넣었습니다.” “잘했다.돈은 그렇게 써야 한다” 이렇게 진주여고의 개교를 위해 ‘털어 넣은 돈’이 논 3만3000평,전 470평과 대지였다고 한다.
의령에는 허씨 선대인 허륜(許倫)의 묘소가 있다.비문(碑文)을 보니 외손(外孫)인 만회(晩悔) 구연호가 썼다는 기록이 있다.만회공은 LG창업자 구인회의 조부이니,구씨와 허씨는 오래 전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서 혼인을 통한 겹사돈이었다.
1946년 1월,구인회에게 허만정이 불쑥 찾아와 부탁을 한다.“이 아이를 맡기고 갈 터이니 사람 만들어주소, 사돈이 하는 일에 출자(出資)도 하리다.”
▲ 허만정 묘소.진주 금곡리 소재.조부인 허임 묘소 하단에 모셨다.묘소의 역량은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을 추동할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
▲ 허만정 묘소.진주 금곡리 소재.조부인 허임 묘소 하단에 모셨다.묘소의 역량은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을 추동할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
이 때 맡긴 이가 막 일본 유학에서 돌아논 3남 허준구였다.LG건설 명예회장을 역임한 허준구의 당시 나이는 24세였다.사돈에서 동업자로 락희화학의 깃발 아래 57년의 동행이 시작되었다.허준구에 이어 허만정의 2남 허학구와 4남 허신구까지 합류하였다.창업 당시 고급인력의 가담은 인재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수한 맨파워를 보유한 점에서 락희로서는 럭키한 출발이었다.
대기업은 오너의 선영중 창업이 가능한 대명당이 있고,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후대에 연속 또는 격세로 대명당이 있다는 것이 필자가 현장에서 터득한 경험칙이다.LG의 구씨는 오랜 선대부터 대명당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LG창업에 풍수적 추동력을 분 것은 구인회 회장의 조부묘소다.그런데 창업회장과 그의 부모 묘소는 2대에 걸쳐 소지소혈(小地小穴)임에도 LG가 지속발전한 것이 필자의 의문이었다.GS의 선영을 보면서,이런 의문이 해소되었다.LG의 구씨 선영이 풍수적 파워가 미약했을 시기에는 GS의 허씨 선영이 풍수적 상보(相補)역할을 했던 것이다.GS의 허씨들은 맨파워 뿐만 아니라 풍수파워로도 LG그룹에 동반자의 역할을 한 셈이다.
허준구는 1950∼60년대 라디오, TV 등 국내 최초로 출시한 제품판매를 총괄하여 LG성장의 주역을 맡았으며 이후 LG전자,LG전선 대표를 역임하고 1995년 구자경 회장이 은퇴를 선언하자 창업세대의 동반퇴진을 자청하여 그룹의 화합에도 힘썼다.그는 2011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의 부친이기도 하다.허준구 부부 묘소는 만두형세로는 뒷산인 죽엽산에서 낙맥(落脈)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맥로의 출발은 백호방의 먼 곳에서 출발하여 장원한 행도를 하여 묘원 앞 동네를 경유하여 묘소의 전면으로 맥이 들어온다.허회장 묘소는 중견기업 이상을 추동할 역량이고, 부인 묘소는 역량이 훨씬 큰 대기업을 추동할 역량으로 근동의 주혈에 정확히 모셨다.GS그룹이 LG와 분리한 이후,자산과 매출규모가 세 배 이상 증가한 것에 결정적인 뒷심이 되었다는 판단이다.두 개의 묘소가 각각 대명당에 자리하니 그 파워는 뎃셈이 아니라 상승작용을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칙이다.
GS는 형제간의 인화를 바탕으로 공동경영체제를 유지하여 오고있다.4세대의 경영승계를 앞두고 있는 GS.형제간의 우애를 넘어 국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유상(儒商) 의 훈향이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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