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 명신(名臣)들의 사적과 언행을 기록한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에 이런 일화가 전한다.세종 때 윤회(尹淮·1380~1436)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어려서 부터 신동으로 불렸다.한 번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 뜰아래서 잠시 쉬어갈 참이었다.공교롭게 그 집 아이가 구슬을 갖고 놀다가 놓쳤는데 곁에 있던 오리가 삼켜 버렸다.아이는 윤회를 의심했고 뒤 이어 좇아 나온 주인이 다그친다.
윤회의 몸을 뒤졌으나 구슬이 나올 턱이 없었다.그러나 주인은 혐의를 거두지 못하고 묶어 관가로 끌고 간다.그는 구슬을 찾고 싶다면 저 오리를 함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다행인 것은 주인이 그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다음 날 오리가 싸놓은 배설물에서 구슬이 나오자 주인이 깜짝 놀라 자신의 불찰을 사과한다.주인은 어제 사실대로 말했으면 이런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대답인 즉 어제 오리가 구슬을 삼켰다고 말했다면 주인은 서둘러 진위를 밝히기 위해 오리의 배를 갈랐을 것 아니냐는 거였다.그렇게 되면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애꿎은 생명을 죽게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있는 그대로 말을 해 짐승을 죽게 만드느니 하룻밤 고생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그의 인내가 오리를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내심구압(耐心求鴨)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는 당대의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날렸고 필명 못지않게 호주가(豪酒家)로 소문이 났다.세종이 신하의 과음을 걱정하여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게 했는데 연회 때마다 큰 그릇으로 석 잔 씩을 마셨다.임금은 술을 금하도록 한 것이 오히려 술을 권한 꼴이 됐다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언젠가는 크게 취한 상태에서 불려나가 조서(詔書)를 기초할 것을 명받았는데 마치 붓이 신들린 듯 임금을 탄복케 했다.
높은 학문과 문장,두주불사의 호방함을 겸비했던 것이다.그는 병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명신의 반열에 오른다.그러나 오리를 구한 그 희생적 인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불이익과 억울함을 기꺼이 참아내는 그런 힘 말이다.당장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그 만큼 멀리 넓게 본다는 것이다.새 정부가 내각을 짜는데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그를 통해 고위관료의 조건을 다시 생각해 본다.
김상수 논설실장 ssookim@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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